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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젖어있는 열한개의 소품] 이야기 하나 (24)
2005/10/15 00:00
입력 조회수 : 733
◇까만색 반부츠-누군가를 대신한 사랑 24
이것이 무덤에서의 마지막 편지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이후는 서울의 생활이 적혀 있었지요. 밤마다 꿈결에 엄마를 부르며 흐느끼는 재민이를 부둥켜안고 울었다는 얘기부터 죽을 각오로 막노동을 하여 보증금 삼백 만원의 단칸방을 하나 얻었다는 내용까지... 물론 그 중간 중간에 부인의 무덤에 홀로 내려가 말없이 눈물 흘리고 돌아왔다는 내용도 섞여 있었지요.
그렇게 몇 장을 더 넘겼을 때였습니다. 제 눈길을 확 빨아들이는 글귀가 있었습니다.
<오늘 당신을 보았소.>
대체 이게 무슨 말일까요? 저는 묘한 흥분에 사로잡혀 글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다른 날보다 일을 일찍 마치고 귀가하던 중이었소. 길이 많이 밀리고 있기에 나는 무료한 눈길을 버스 차창 밖으로 던지고 있었지. 거리를 메운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표정으로 스쳐 지나고 있더군. 저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즐겁게 수다 떨고 있는 젊은 여인들, 잠시도 떨어질 수 없다는 듯 꼭 붙어 다니는 연인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중년 신사, 그 사이를 빠져나가는 오토바이의 곡예운전... 서로 어우러져 지나가면서도 그들만의 영역에 고립되어 있는 인간 군상들... 그 안에는 희열과 고뇌와 삶의 치열함이 혼돈으로 휘몰아치고 있었소. 물론 나도 그 중에 하나일 테고. 그런데... 그런데 말이오. 고립되어 있지 않은 하나가 그 안에 존재하고 있었소. 어깨에 찰랑한 고운 머릿결, 깔끔한 이목구비, 보기만 해도 가슴 저미는 긴 목까지... 바로 당신이었소. 나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소. 그런데 그때 하필 차가 출발하다니... 너무 원망스러웠소. 당신은 뒤로 나는 앞으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으니 말이오. 운전 기사에게 달려가 제발 내리게 해달라고 사정했소. 처음에는 단호하게 거부하더군. 하지만 내가 계속 사정하는 데다가 신호 대기까지 걸리자 짜증스러운 말 한마디와 함께 문을 열어주었소. 나는 자동차 사이를 가로질러 당신을 처음 발견했던 장소로 뛰어갔소. 하지만 이미 사라진 뒤였지. 미친 듯이 주변을 뛰어다녔지만 결국은 발견할 수 없었소. 너무나 허탈했소. 그리고 혼란스러웠소. 어째서 당신은 그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었을까? 나는 이런 생각에 묻혀 밤이 이슥해지도록 부근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소. 그렇게 서너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재민이의 얼굴이 떠올랐소. 아빠를 기다리며 저녁도 굶고 있을 녀석의 모습이 말이오. 그제야 제정신이 들더군. 그래 당신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 아마도 먼발치의 모습이 당신과 흡사한 사람이었을 거야.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집으로 발길이 돌려지더군.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여인의 모습이 계속 눈에 아른거려 나는 지금 잠을 이룰 수가 없구려. 그 여인은 과연 당신과 똑같이 생겼을까? 그렇다면 혹시 마음씨도, 목소리도 당신과 닮지 않았을까? 나는 오늘 이런 공상을 하며 잠자리에 들어야 할 것 같소.>
이것이 무덤에서의 마지막 편지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이후는 서울의 생활이 적혀 있었지요. 밤마다 꿈결에 엄마를 부르며 흐느끼는 재민이를 부둥켜안고 울었다는 얘기부터 죽을 각오로 막노동을 하여 보증금 삼백 만원의 단칸방을 하나 얻었다는 내용까지... 물론 그 중간 중간에 부인의 무덤에 홀로 내려가 말없이 눈물 흘리고 돌아왔다는 내용도 섞여 있었지요.
그렇게 몇 장을 더 넘겼을 때였습니다. 제 눈길을 확 빨아들이는 글귀가 있었습니다.
<오늘 당신을 보았소.>
대체 이게 무슨 말일까요? 저는 묘한 흥분에 사로잡혀 글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다른 날보다 일을 일찍 마치고 귀가하던 중이었소. 길이 많이 밀리고 있기에 나는 무료한 눈길을 버스 차창 밖으로 던지고 있었지. 거리를 메운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표정으로 스쳐 지나고 있더군. 저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즐겁게 수다 떨고 있는 젊은 여인들, 잠시도 떨어질 수 없다는 듯 꼭 붙어 다니는 연인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중년 신사, 그 사이를 빠져나가는 오토바이의 곡예운전... 서로 어우러져 지나가면서도 그들만의 영역에 고립되어 있는 인간 군상들... 그 안에는 희열과 고뇌와 삶의 치열함이 혼돈으로 휘몰아치고 있었소. 물론 나도 그 중에 하나일 테고. 그런데... 그런데 말이오. 고립되어 있지 않은 하나가 그 안에 존재하고 있었소. 어깨에 찰랑한 고운 머릿결, 깔끔한 이목구비, 보기만 해도 가슴 저미는 긴 목까지... 바로 당신이었소. 나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소. 그런데 그때 하필 차가 출발하다니... 너무 원망스러웠소. 당신은 뒤로 나는 앞으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으니 말이오. 운전 기사에게 달려가 제발 내리게 해달라고 사정했소. 처음에는 단호하게 거부하더군. 하지만 내가 계속 사정하는 데다가 신호 대기까지 걸리자 짜증스러운 말 한마디와 함께 문을 열어주었소. 나는 자동차 사이를 가로질러 당신을 처음 발견했던 장소로 뛰어갔소. 하지만 이미 사라진 뒤였지. 미친 듯이 주변을 뛰어다녔지만 결국은 발견할 수 없었소. 너무나 허탈했소. 그리고 혼란스러웠소. 어째서 당신은 그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었을까? 나는 이런 생각에 묻혀 밤이 이슥해지도록 부근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소. 그렇게 서너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재민이의 얼굴이 떠올랐소. 아빠를 기다리며 저녁도 굶고 있을 녀석의 모습이 말이오. 그제야 제정신이 들더군. 그래 당신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 아마도 먼발치의 모습이 당신과 흡사한 사람이었을 거야.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집으로 발길이 돌려지더군.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여인의 모습이 계속 눈에 아른거려 나는 지금 잠을 이룰 수가 없구려. 그 여인은 과연 당신과 똑같이 생겼을까? 그렇다면 혹시 마음씨도, 목소리도 당신과 닮지 않았을까? 나는 오늘 이런 공상을 하며 잠자리에 들어야 할 것 같소.>
백산
수정일 2002년11월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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