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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젖어있는 열한개의 소품] 이야기 하나 (23)
2005/10/10 00:00
입력 조회수 : 771
◇까만색 반부츠-누군가를 대신한 사랑 23
<혹시 오늘은 휘영청 달빛에 당신 모습이 비칠까...
혹시 오늘은 당신 무덤 베고 자는 꿈결에라도 아른아른 그 목소리 들려오지 않을까...
그렇게 기다린지 벌써 이레가 지났소. 그런데도 야속한 당신은 먼발치 뒷모습 한 번 보여 주지도, 아름거리는 목소리 한 번 들려주지도 않는구려. 내가 많이 미웠던 게지......
어떻게든 꼭 한 번 보고 싶었는데... 그만 가야 할 것 같소.
기다림에 지친 것은 아니오. 평생을 기다려준 당신도 있는데, 고작 이레의 기다림에 지쳤다면 말이 안 되지.
그렇다고 육신이 고달파 가려는 것은 더욱 아니오. 이깟 빈 껍데기는 하시(何時)라도 저 땅에 적선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아니, 생각 같아선 지금이라도 당신 옆에 나란히 눕고 싶은 심정이오.
그런데 오늘 재민이가 서울에서 내려왔소. 아마도 동네 어른들께서 동생 민진이에게 연락을 했던 것 같소.
나를 보더니 둘이 부둥켜안고 울더군. 초췌하고 꺼칠한 모습이 안 되 보였던 모양이지. 그 어두운 땅 속에서 차가운 흙을 깔고 덮은 당신도 있는데, 며칠 굶고, 씻지 않은 게 뭐 그리 안타까운 일이라고.....
누가 쑤어주었는지 죽을 한 그릇 가지고 왔기에 말 없이 먹었소. 물 한 모금에, 쌀 한 수저로 수만 리 저승길 떠난 당신을 생각하면 목이 메어 넘어가지 않았지만, 눈물 그렁한 재민이를 보니 먹어지더군.
수저를 놓고 당신 무덤에 기대 누우니 재민이가 가만히 다가와 곁에 누웠소. 그리고는 녀석이 뭐라고 했는지 아오?
'매일, 매일 엄마가 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아빠가 더 그리웠어요. 재민이도 그 정도는 알아요. 아무리 기다려도 엄마는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아빠가 더욱 필요해요.'
아마도 민진이가 가르쳐준 말이겠지만, 수염 더부룩한 내 얼굴을 매만지는 녀석의 고사리 손에는 간절함이 배어 있었소.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다는 생각이 들더군. 내 슬픔에만 겨워 어린 재민이를 팽개쳐 두었으니...
내 슬픔이 아무리 크다 한들 녀석의 두려움만 하겠소? 졸지에 어미를 잃었는데, 아비마저 미몽(迷夢)을 헤맨다면 녀석에겐 세상이 너무도 어둡고 춥게 느껴지겠지. 그래서 올라가기로 결정을 했다오.
부디 서운해하지는 마오. 자주 내려와 보리다. 와서 당신의 잠자리가 불편하지는 않은지, 어두운 밤이 무섭지는 않은지, 너무 한적해서 쓸쓸하지는 않은지 세심히 돌봐 주리다.
그러니 당신도 가끔은 모습을 보여주구려. 긴 새벽 꿈결에라도 잠시, 처연한 미소말고 조금은 따듯한 미소로...
오늘밤엔 부디 당신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백산
수정일 2002년11월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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