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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젖어있는 열한개의 소품] 이야기 하나 (20)
2005/09/22 00:00
입력 조회수 : 667
◇까만색 반부츠-누군가를 대신한 사랑 20
우리는 곧바로 재민이가 기다리고 있을 아파트로 향했습니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해두었는지 몰라도 재민이는 우리를 꽤나 기다리고 있었던 눈치였습니다.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꾸벅 하고는 호기심 가득하면서도 설레는 눈길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재민이의 모습은 정말로 사랑스러웠습니다.
무엇보다도 선물 상자를 뜯어보고 좋아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상자를 하나하나 열어보며 새로운 공룡이 나올 때마다 환호하던 그 천진난만한 모습은... 사랑스럽다는 말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 모습이 좋았던지 당신도 보기 드물게 환한 미소를 짓고 계셨지요.
"재민아 우리 맛있는 것 사먹으러 나갈까?"
제가 묻자 재민이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밖에서 먹으면 비싸기만 해요. 그냥 집에서 먹어요."
요즘 아이들답지 않은 예상 밖의 대답에 제가 잠시 당황하고 있자 재민이는 제 손을 잡아 주방으로 안내했습니다.
"아빠가 맛있는 것 만들어 주신댔어요. 그래서 어제 장도 봐 왔는걸요?"
이렇게 말하며 냉장고 문을 여는데, 얼마나 많은 재료를 준비해 두었는지 커다란 냉장고 안이 꽉 들어 차 있었습니다.
"정말이에요?"
제가 의아한 시선으로 묻자 당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상의를 벗으며 팔을 걷어 붙이셨습니다.
"생각보다 요리를 잘 한다오."
"그래도..."
"평소에도 제대로 못해주는데, 생일마저 남이 만든 음식으로 때우는 것은 너무 무성의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오."
"그럼, 제가 준비할게요."
당신이 부엌일을 하는 것은 왠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제가 나섰습니다만, 당신은 완곡하게 사양했습니다.
"오늘까지 당신은 손님이니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시오. 준비가 다 되면 부르리다."
"네?"
저는 놀란 눈으로 당신을 바라보았습니다. 당신은 아무런 의미 없이 내뱉은 말이겠지만 제게는 특별한 의미로 와 닿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까지'라는 말이...
그 말은 곧, 오늘 이후에는 손님 자격이 아닌 식구로 받아들이겠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지나친 비약일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제게는 상당한 충격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런 심정을 눈치 채지 못한 듯 했습니다.
"그동안 집안 구경이나 하구려. 재민이가 안내해 줄 거요."
당신은 저를 재민이에게 맡겨 둔 채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내 싱크대로 가셨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다가가서 당신의 의중을 물어보고 싶었습니다만 곁에서 조용히 손을 잡아 흔드는 재민이가 있어서 그럴 수 없었습니다.
"아빠 방부터 구경시켜 드릴게요."
말간 눈동자로 올려다보며 말하는 입술조차도 사랑스러워 보이는 아이였습니다.
"그럴까?"
백산
수정일 2002년 11월2일 09시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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