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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젖어있는 열한 개의 소품] 이야기 하나 (16)
2005/08/24 00:00
입력 조회수 : 712
◇까만색 반부츠-누군가를 대신한 사랑 16
신경은 온통 전화벨과 초인종 소리에 집중되어 있었고, 머릿속엔 오로지 당신 모습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은근한 기다림이나 막연한 기대가 아니었습니다. 갈망이었고, 열망이었습니다.
도대체 제가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열병과도 같이 매우 급작스럽고 격렬한 감정의 동요를 동반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간혹은 사춘기를 매우 늦게 겪는 경우가 있다고 하던데 제가 바로 그런 경우였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기다림이 의례 그렇듯이 시간은 더디고도 더디게 흘러갔습니다. 한참 지났다 싶어 고개를 들어보면 오 분이 지났고, 또 한참 있다 보면 십 분이 지난... 전화 한 통화 없는 당신이 야속할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막연한 기다림을 계속 이어가고 있던 저는 한순간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제게 언제 오겠다는 약속을 하신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약속조차 되어있지 않은 기다림, 이런 것도 기다림이라고 할 수 있을지... 왠지 한없이 초라해지고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진열장에서 위스키 한 병을 꺼내 왔습니다. 그리고 잔을 채우려 할 때였습니다.
딩동!
그토록 애를 태우던 초인종이 맑은 울음을 토해냈습니다. 저는 무의식적으로 달려나갔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초인종이 울리기도 전에 문고리를 잡아 돌렸습니다.
"민석씨?"
지난밤 그렇게 서먹해 하던 호칭은 자연스럽게 바뀌어있었고, 야속해하던 마음은 어느새 눈 녹듯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누구시죠?"
문 앞에는 웬 낯선 청년이 서 있었습니다.
"혹시 이주연씨 되십니까?"
"맞습니다만..."
그제야 저는 청년을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유니폼으로 보이는 노란색 티셔츠에 줄무늬 모자를 눌러쓴 그 청년의 양손에는 커다란 꽃바구니 하나와 납작한 종이상자가 들려있었습니다.
"주문하신 물품입니다. 여기에 사인 좀 해주시죠."
저는 얼떨결에 사인을 해주고는 물건을 받아들었습니다.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청년이 인사를 꾸벅하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지고 난 뒤에도 저는 영문을 몰라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꽃바구니는 여타의 장식물을 일절 배제한 채 붉은 장미로만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장미의 아름다움엔 더 이상의 치장이 필요 없다는 것처럼 보였지요. 또한 그 안의 꽃송이들은 덜 피어나지도, 그렇다고 만개하지도 않은, 그래서 더욱 폭발적인 아름다움으로 제 시야를 도발해 들어왔습니다. 그 타는 듯한 붉은 빛에 눈이 시려왔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얼굴이 그 위로 겹쳐졌습니다.
"혹시..."
저는 황급히 집안으로 들어와 꽃바구니를 살폈습니다. 역시... 자그마한 카드 봉투가 바구니 한쪽에 꽂혀 있었고, 겉봉에는 선명한 글씨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101송이의 장미를 보내오. 유민석
제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생겨났습니다.
-101송이의 장미가 무엇을 뜻하는지 아오?
카드의 내용은 이런 질문으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오. 1은 첫 시작이어서 위태롭고, 100은 끝이어서 외롭게 느껴지지만 101은 하나가 끝나고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소.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말이오.
당신의 말대로라면 저는 첫 시작이니 위태로운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좋았습니다. 당신이 외로움, 혹은 절망이란 긴 터널을 지나 새로운 희망의 세계로 진입했다는 의미도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면 충분했습니다.
-추신 : 과음한 다음날은 속이 많이 쓰린 법이오. 그래서 입맛도 없고... 하지만 그럴수록 속을 든든히 채우는 게 중요하오. 그래야 나와 다시 한 잔
마실 수 있지 않겠소? 사장님께는 몸살이 나서 못나온다고 거짓말을 해놓았소. 원래 거짓말을 잘 못하는 성격이라 속아 주셨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일은 꼭 출근하길 빌겠소. 하루 못 보니까 왠지 허전해서 말이오.
백산
수정일 2002년9월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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