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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젖어있는 열한 개의 소품] 이야기 하나 (15)
2005/08/01 00:00
입력 조회수 : 714
◇까만색 반부츠-누군가를 대신한 사랑 (15)
제가 기억해 낼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였습니다.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지만 저는 한동안 침대에 쪼그려 앉은 채 움직일 줄을 몰랐습니다. 아니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제 정신이 아니었어...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는 해도 그 말을 정말로 내뱉고 말다니..."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벽에도 천장에도, 심지어는 방바닥에도 눈이 달려있어서 저를 비웃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요즘 젊은 세대들은 키스를 가벼운 인사 정도로 여긴다고 생각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저처럼 이성과 손을 잡아본 일조차 거의 없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이성을 두려워한다거나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만한 기회가 별로 없었고, 관심도 그리 많지 않았던 것뿐이지요. 아니, 관심이 없다기 보다는 이성에게 먼저 말 붙이는 것을 힘들어했다는 표현이 맞겠습니다.
그랬던 제가 당신에게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정말로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먼저 키스를 해달라고 매달리다니...
저는 밤새도록 부끄러움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렇게 날이 새버리고 다음날 아침이 찾아왔지만 저는 여전히 침대에서 내려올 생각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문득 시계를 쳐다보니 출근시간에 임박해 있더군요. 하지만 출근할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얼굴을 보기가 두려웠던 것이겠지요.
그렇게 다시 시간이 흘러, 커튼 사이로 길게 스며들던 아침 햇살이 창문 쪽으로 잔뜩 물러났을 때에야 저는 어렵게 용기를 내어 침대를 벗어났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집안청소를 시작했습니다. 뭔가 다른 일에 몰두하다보면 얼굴 화끈거리는 지난밤의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침구를 정리하고, 지난밤에 마셨던 술자리를 치우고... 우선은 눈에 띄게 어질러진 곳부터 청소해 나갔습니다만 혼자 사는 살림이다보니 치울 것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저는 일거리를 만들어가며 청소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세탁한지 얼마 되지 않는 커튼을 떼어서 빨고, 거실의 카페트를 먼지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청소기로 몇 번이고 밀고, 욕실의 변기부터 베란다 바닥까지 윤기가 날 정도로 닦고 또 닦았습니다.
그렇게 저녁 무렵이 되었을 때, 저는 이상한 점 한 가지를 문득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청소를 시작했을 때부터 그때까지 제가 무엇인가를 줄곧 기다리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거실 청소를 하면서 끊임없이 전화기를 바라보았고, 화장실 청소를 하면서 초인종소리가 울리는지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며 베란다를 청소 할 때는 혹시 눈에 익은 자동차가 들어오지 않나 주차장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너무도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온 종일 전화 한 통화 없으셨습니다. 갑자기 맥이 탁 풀린 저는 걸레를 욕실에 던져두고는 소파에 몸을 묻었습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일곱시를 가리키고 있더군요.
항상 앞서 배려하는 자상함을 보여주던 당신께서 그때까지 전화 한 통화도 없다는 것은...
"내게 실망한 거야..."
남자들은 너무 쉽게 마음을 여는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났습니다.
"바보같이..."
자책감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존심도 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끊임없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백산
수정일 2002년9월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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