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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젖어있는 열한 개의 소품] 이야기 하나(9)
2005/06/29 00:00
입력 조회수 : 693
◇까만색 반부츠-누군가를 대신한 사랑 (9)
부츠 신은 제 발을 내려다보며 눈물이 그렁하던 그때의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도대체 그 부츠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었던 거지요?
질문을 하다가 문득 당신을 올려다 본 저는 움찔 놀라고 말았습니다. 당신이 한없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뭐라고 설명해야 그 느낌을 전달 할 수 있을까요?
허무? 공허? 아니, 이런 말로는 형용 할 수 없습니다. 굳이 말로 표현해야 한다면 '존재의 부재'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인데도 전혀 존재감을 느낄 수 없는 그런 눈빛 말입니다.
그제야 저는 제가 크게 실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물은 이미 엎어진 상태였고, 저로서는 되돌릴 방법이 없었습니다.
저...
어떻게든 화제를 돌려보려고 머뭇거리고 있자니 당신이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습니다.
언젠가는 말씀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내키지 않으면 굳이 하지 않으셔도...
그렇게 대단한 비밀은 아닙니다. 지영씨는 부츠를 선물 받은 당사자이니 알 권리도 있고요...
당신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자그마한 사업체를 하나 경영하다가 IMF를 맞이했노라고, 동분서주하며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나라 전체를 휩쓸고 있던 IMF의 거센 파고를 견딜 수 없었노라고. 그리고 그때 아내는 중병을 앓고 있었노라고. 그런데 자신은 회사를 살리기 위한 노력의 십분의 일도 아내에게 다 하지 못했노라고. 결국 회사는 파산했고, 자신은 병든 아내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작은 비닐 하우스에서 생활을 해야 했노라고...
아내에 관한 말을 하면서부터 당신의 눈빛은 우울하게 물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어쨌든 먹고는 살아야겠기에 막노동을 시작했지요. 평생 육체노동을 해본 적이 없었던 터라 쉽지 않더군요. 하지만 고단한 육체보다 더 힘든 것은 점점 쇠약해져 가는 그 사람을 바라보는 일이었습니다. 이미 3기가 지나 손댈 수조차 없는 커다란 종양을 머리 속에 넣고 있으면서도 그 사람은 다가오는 결혼기념일을 위해 비단 조각에 수를 놓고 있더군요.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날이 갈수록 장미 줄기가 가늘어지는 겁니다.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심한 통증이 찾아오는 주기가 점점 짧아지면서 손끝에 힘이 빠졌던 게지요.
당신은 쇠약해진 아내의 모습을 다시 보고 있는 듯 눈빛을 고통스럽게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뻔히 보고있으면서도 진통제를 찾아 주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너무
저주스러웠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을 때 느껴지는 무력감... 남자들이 가장 비참해지는 것은 이럴 때일 겁니다. 하지만... 가늘어져 가는 줄기 위에 꽃망울을 수놓으려 사력을 다하는 그 사람을 보고 있자니 무력감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날부터 일당을 받을 때마다 오천 원씩을 따로 떼어 두었지요. 결혼기념일을 한 달 가량 남겨둔 때였습니다.
당신의 눈에는 어느새 넘쳐날 듯 찰랑한 눈물이 말갛게 고여 있었습니다.
백산
수정일 2002년8월17일01시10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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