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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젖어있는 열한 개의 소품] 이야기 하나 (5)
2005/05/01 00:00
입력 조회수 : 600
◇까만색 반부츠-누군가를 대신한 사랑 (5)
저녁식사는 매우 만족스러웠습니다. 음식 맛도 괜찮았지만, 조용하고 우아한 식당의 분위기 와 몸에 배어있는 듯한 당신의 에티켓이 저를 더욱 매료 시켰던 것 같습니다. 식사 도중 간간이 마신 포도주 때문인지 저는 자리에서 일어날 즈음 상당히 취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얼굴이 붉어지는 체질이 아니어서 당신은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어쩌면 그것 또한 상대를 위한 배려였는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술기운이 약간 오른 저는 당신에게 자리를 옮겨 칵테일 한 잔 할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누군가에게 먼저 술자리를 제의하는 것은 정말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그것도 남자에게 말입니다. 당신도 의외였는지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기분 좋은 표정으로 응낙하셨지요.
당신과 함께 간 곳은 회사 근처에 있는 자그마한 카페였습니다. 환갑이 지난 노신사가 운영과 함께 바텐더를 겸하고 있는 곳이었는데, 조용하면서도 포근한 분위기가 좋아서 가끔 들르던 집이었지요. 그곳에서 우리는 꽤 많은 술을 마셨고, 그만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대화가 길어질수록 회사가 아닌 다른 어디에선가 당신을 본적이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느낌은 첫 대면에서 받는 것이 보통인데, 왜 그때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술기운으로 얽힌 머리 속을 헤집으며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영상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흔히들 겪는 일이지만 이럴 때는 인근에 살고 있어서 알게 모르게 여러 번 지나친 적이 있다거나 지인(知人) 중에 비슷한 사람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근처에 살지도 않을뿐더러 아무리 생각해도 비슷한 외모를 지닌 사람을 떠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궁금증을 참다못해 물어보았지요.
우리 혹시... 이 회사에 다니기 전에 어디선가 만난 적이 없었던가요?
당신은 아무대답 없이 씩 웃으셨습니다. 저는 그 미소를 부정의 의미로 받아 들였기에 더 이상 묻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 몇 잔의 칵테일을 더 마신 뒤 우리는 카페를 나왔습니다. 어느새 깊숙한 밤의 영역으로 들어선 시간이더군요. 도시의 네온사인이 힘겹게 어둠을 밀어내 보지만 거대하게 드리운 먹빛 하늘은 침묵으로 모든 것을 흡수하고 있었습니다.
문득 한기가 느껴졌습니다. 한국의 봄은 일교차가 심하다는 사실을 깜빡 잊었던 것이 실수였습니다. 저는 화사한 오후의 날씨만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짧은 스커트와 얇은 블라우스를 걸치고 있었습니다. 물론 겉옷이 하나 있기는 했지만, 그것 또한 0도 가까이 떨어진 기온을 막아내기에는 어림없는 두께였습니다. 사실 개나리가 노랗게 피어나고 목련의 꽃망울이 하얀 이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계절에는 어떤 여자라도 두터운 외투를 입고 싶지 않을 겁니다.
설 오른 술기운까지 겹쳐 오들오들 떠는 제게 당신은 아무 말 없이 상의를 벗어 주었습니다. 너무나 추웠기 때문에 저는 사양할 엄두도 못 내고 당신의 옷으로 몸을 감쌌습니다. 상의에 남아있던 당신의 체온이 느껴지더군요. 하지만 다리로 몰려오는 한기는 막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추워요...
술기운 때문이었을까요? 저는 연인에게나 보낼법한 눈길로 당신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눈길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저 자신은 알지 못했습니다. 창피한 얘기지만 그때까지 남자를 한 번도 사귀어 본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어디론가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오 분도 채 지나기 전에 다시 달려오는 당신의 손에는 작은 쇼핑백 하나가 들려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문뜩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언젠가 지하철 역 앞에서 낡은 쇼핑백을 들고 제게 다가왔던 그 사내 말입니다. 제 머리 속에선 두 사람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겹쳐지기 시작했습니다. 때에 절은 외투가 벗겨지고 까칠한 수염이 지워지자 당신의 모습에 빈틈없이 들어맞았습니다. 큰 충격이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었다니...
망연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저에게 당신은 쇼핑백을 가만히 건네 주었습니다.
급히 사오느라 이것저것 고를 겨를이 없었습니다. 마음에 흡족하지 않더라도 우선 걸치시지요. 추위는 가릴 만 할 겁니다.
백산
[
피플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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