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이사람] (372) 사진촬영 전문 H I D출신 반대규 대한민국특수임무수행자회 고문
영화사 촬영기사로 활동하다가 한순간에 우연찮게 북파공작원으로 운명이 바뀐 드라마틱한 인물. 사진촬영 전문 H I D출신 반대규(71) 대한민국특수임무수행자회 고문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정확한 통계는 파악할 수 없지만 대략 1만 5천 명 쯤으로 추산되는 전체 북파공작원 중에서도 워낙 독특한 이력 때문에 HID는 물론이고 육해공군 첩보부대 출신을 통 털어 두드러지게 눈에 띠는 그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로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영화사 촬영기사였던 그는 1962년 중앙정보부에 차출되어 H I D 사진교육 전문으로 북파공작원과의 첫 인연을 맺었다.
민간인 신분으로 육해공군 첩보부대 사진교육 활동 1년 만에 영화사로 돌아왔지만 1966년 첩보부대에 다시 불려가 대북 침투로 개척을 위한 휴전선 촬영 임무를 하달 받고 H I D 현역장교들의 호송을 받으며 155마일 휴전선을 누비고 다녔다.
카메라 렌즈 길이만 해도 장장 1.2 M나 되는 특수 촬영 장비를 지니고 1966년부터 휴전선을 계속 찍다가 1968년 1월21일 북한무장간첩 청와대 습격사건이 터지자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를 데리고 다니며 반공첩보교육영화 ‘3천만의 분노’를 만들었다.
영화사를 거쳐 H I D와 인연을 맺은 이후로도 그는 사진 교육, 휴전선 촬영, 영화 촬영 등 한 번도 손에서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
“박정희대통령 특별지시로 북한 주민 생활 찍어 오라고 해서 제가 개발한 망원렌즈 카메라로 ‘북한주민생활’ 영화도 만들었지요.”
북파공작원 치고 기구한 사연 없는 사람 어디 있겠나 싶어 사연을 물어보니 그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 휴전선 동부전선에서 한국전쟁때 산화한 군인의 철모 한가운데 뻥뚫린 구멍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반대규 고문. 멀리 부서진 철마가 당시의 참상을 말해준다. 1977년 휴전선에서 촬영. © 피플코리아 | |
한국전쟁 때 형이 인민군에 끌려가 우물에 빠져 죽었다는 말을 듣고 정보사에 자원하여 병역면제대상이었지만 H I D 요원이 되기로 결심했다는 반 고문은 자신에 이어 병역 면제자였던 아들 또한 자원서를 써서 현역으로 보냈다며 아픈 과거를 털어놓는다.
한국전쟁 발발후 첩보업무 활성화를 위해 무장공작원을 훈련시키고 북파를 담당했던 부대가 바로 육군첩보부대(H I D) 제1교육대이다.
H I D의 변천사를 보면 명칭도 1961년 A I U(Army Intelligence Unit)로 바뀐 뒤 1972년 육군정보사(A I C;Army Intelligence Command)로 통합되었다가 1990년 육해공군 정보부대를 현재의 국군정보사령부(D I C: Defence Intelligence Command)로 통합하여 오늘에 이른다.
민간인 신분으로 정보사에 들어가 온갖 애환을 겪으며 사진 촬영을 해오던 그는 1973년 정보사령부 별정직 3급(대령급)으로 정식 직원이 되어 1979년까지 활동하면서 참으로 많은 일을 해냈다. 북에 잠입하지 않고 멀리서 적진을 찍는 촬영장비도 그가 직접 개발했다.
“북파공작원들이 인민군 부대막사나 찍으려고 무모하게 들어가다 다 죽잖아요. 그래서 정사진, 동영상으로 북한군 동향의 전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카메라 장비를 개발했죠. 지구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특수장비죠.”
북한과 가장 가까운 GP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먼 거리까지 인민군 활동, 훈련 모습을 동영상으로 촬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에 잠입하지 않고도 그가 개발한 장비로 북한군 소대, 분대 병력 이동, 훈련하는 현장을 훤히 찍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미군 장교 2명이 북한군에게 도끼로 살해당한 ‘도끼만행사건’ 현장 사진도 그가 찍었다.
육해공군 통 털어 H I D 대원 사진교육, 항공촬영, 휴전선침투로 확보 촬영, 첩보교육 영화, 북한주민생활 영화 촬영한 사람은 국내에서 그가 유일하다.
73년부터 79년까지 판문점, 휴전선 사진촬영을 전담하는 등 군무원으로, 북파공작원으로, 정보사령부 별정직 3급(대령급)으로 1인3역의 독특한 이력 덕분에 월급을 한 달에 3번이나 탔다니 이 또한 흔치 않은 일이다.
그가 아니면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특별한 일이었기에 ‘계급장 없는 군복’의 그는 전방부대 어딜 가나 ‘귀하신 몸’이요 특별 대우였다.
1962년 H I D요원 사진교육을 시작으로 1979년까지 자그마치 18년을 북파공작원과 함께 생사고락을 해왔으니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다.
1979년을 끝으로 정보사령부에서 물러난 이후로도 그는 공법단체 대한민국특수임무수행자회 고문, 특수임무수행자회 산하 정보연구소 소장. 국가쇄신국민연합 상임위원을 맡는 등 여전히 바쁘게 산다.
지난 3월에는 국가쇄신국민운동 연합과 연대하여 18대 총선에 출마했던 이재오, 손학규, 정동영, 노회찬 등 ‘총선낙선 대상자’ 를 선정하고 명단을 공개하는 기자회견을 열어 낙선을 주도하기도 했다.
70대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그는 지금도 북파공작원으로 불리는 대한민국특수임무수행자회 행사가 열리는 날이면 전국 어디라도 어김없이 카메라를 둘러메고 현장에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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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4월 18일 17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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