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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젖어있는 열한개의 소품] (46) 이야기 둘 (18)
2006/03/05 00:00
입력 조회수 : 785
◇웨딩드레스 -돈으로 거래 된 사랑 18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실타래처럼 얽혔던 머릿속이 환하게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다인?"
-네... 다인이에요...
그녀는 심하게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해 왔다.
-동생이 죽었어요. 부지런히 달려왔는데 그렇게 죽어버렸대요...
사실 그녀의 동생이 죽은 것은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내가 슬퍼 해야할 이유도 없다. 내가 아는 것은 그녀일 뿐이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가슴이 뭉클해 온다.
-죄송해요. 바로 갈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럴 테지. 동생 장례를 치러야 하니까. 그런데 돈은 필요하지 않아?" 이럴 때 왜 하필이면 돈 얘기를 꺼냈을까? 그것말고도 위로의 말이 얼마든지 많은데... 아무래도 버릇인 모양이다. 돈만 있으면 여자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는 오래된 고정관념에서 오는...
-돈은 충분히 있어요. 그보다...
하고싶은 말이 있는 듯 한동안 머뭇거리던 그녀는 '아니에요'라는 말로 대신했지만, 나는 캐묻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는 그녀에게 하고싶은 다른 말이 강렬하게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고싶다...'
그러나 이 말을 입 밖에 낼 수는 없다. 우리는 이런 말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관계이기 때문이다.
할 말이 궁색해서 잠시 머뭇거리고 있자니 '그녀도 혹시 이런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어야했다. 돈으로 여자를 사는 사내를 진심으로 좋아할 여자는 세상에 하나도 없을 테니까.
"동생 장례 잘 치러주고 천천히 와. 혹시 돈이 부족하면 전화하고." 결국 나는 이런 말밖에 해 줄 수 없었다. 그러자 약간은 화가 난 듯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왔다.
-돈은 충분하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그동안 다인을 겪어 온 후로 이런 투의 말은 처음이다. 여자에 관한 모든 것을 돈과 결부시키려는 내 말투 때문일까? 어쩌면 자신이 돈으로 거래되었다는 사실이 상기되어 자존심을 상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는데, 다시 평상으로 돌아온 다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되도록 빨리 돌아가도록 노력할게요.
그런데 그 말이 왠지 '당신과 맺은 계약에 지장이 없도록 노력할게요'라는 뜻으로 들린다.
"다인..."
-죄송해요. 갑자기 이런 일이 생겨서 진석씨를 챙겨 드리지도 못하고...
"내 걱정은 말고 그쪽 일이나 신경 써서 처리하도록 해. 조금 늦어져도 상관없으니까 부모님도 충분히 위로해 드리고.
-고마워요. 그럼 나중에 또 전화 드릴게요.
"그래, 몸 상하지 않게 잘 지내."
-진석씨야말로 몸 상하지 않게 잘 챙겨 드세요.
"알았어."
-그럼 안녕히 계세요.
찰칵, 수화기 내려놓는 소리가 들려온 후에야 나는 다인의 집 전화번호를 묻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렇게 되면 천상 그녀가 다시 전화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답답한 노릇이다. 뭔가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가만, 방금 기다림이란 단어를 떠올린 것인? 그렇다면 정말로 병이 단단히 든 모양이다. 내가 한 여자를 상대로 기다림이란 표현을 쓰다니... 아무래도 생각을 한 번 정리해 봐야할 것 같다. 대체 그녀에 대한 나의 감정이 무엇인지.
백산
수정일 2003년 05월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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