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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젖어있는 열한개의 소품] (45) 이야기 둘 (17)
2006/02/28 00:00
입력 조회수 : 713
◇웨딩드레스 -돈으로 거래 된 사랑 17
정말 그런 걸까? 그녀가 집이 비었다는 이유로 여자를 찾아 밤거리를 헤매면서도 다른 여자들을 거부했던 그 행위가 정녕 외로움에서 기인한 것일까? 그런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다인이 비운 자리가 생각보다 크게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머리가 더욱 아파진다. 골치 아픈 생각은 뒤로 미루고 물부터 마셔야겠다는 생각으로 냉장고를 열던 나는 문에 붙어있는 노란 쪽지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내 눈높이에 맞추어 붙어 있는 그 쪽지에는 눈에 익은 글씨체로 이런 말이 쓰여있었다.
-혼자 있어서 심심하다고 술 드시면 안 되요. 그래도 혹시 몰라 꿀물을 타 놓았어요. 되도록 드실 일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어쩔 수 없이 과음하는 일이 있으면 꿀물로 숙취를 푸세요. 가장 안쪽에 있는 생수 병에 담아 두었어요.
이 글을 보고 있자니 다인에 대한 생각이 갑자기 그리움으로 밀려든다. 그녀가 집을 비운 것은 겨우 하루에 불과한데... 진마담이 했던 말이 다시 귓전을 앵앵거린다. 그러자 머리가 또 아파온다. 꿀물을 병째 물고 벌컥벌컥 들이키니 속은 시원해진다. 하지만 지끈거리는 두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인에 대한 나의 감정을 정리하기 전에는 사라질 두통이 아닌 것 같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다시 몸을 눕히며 다인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물끄러미 바라보며 살며시 미소짓고 있는 모습이다. 이번에는 그녀와 지냈던 날들을 기억해 보았다. 무릎에 내 머리를 올려놓고 귀를 파주던 일, 어렵게 탈고를 마치고 기진맥진해서 누워있으면 아무 소리 없이 다가와 다리며 어깨를 주물러 주던 일, 언제나 내가 좋아하는 메뉴를 준비해두고 환한 미소로 맞아주던 식사시간들이 차례로 떠오른다.
처음에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던 이유는 색다른 자극을 주는 섹스였건만 지금 내 기억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그 외의 장면들뿐이다. 그녀에게는 섹스 이외에 나를 사로잡을 수 있는 그 무엇이 따로 있다는 얘기인가?
머리만 더 아파지는 것 같아 그녀에 대한 생각을 그만 두려는데, 불현듯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그 사람이 내게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 알고 싶다면 그 사람이 내 곁을 영원히 떠났다고 상상해 보아라. 그랬을 때 서운함, 아쉬움, 불편함 따위의 감정으로 표현이 된다면 오래 지나지 않아 잊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뒤의 일이 온통 까만 색으로 채색되어 있다면, 그래서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진정으로 중요한 사람이다. 자동차가 없어진다면 아쉽거나 불편하겠지만 공기가 사라진다면 그 다음 일은 생각할 수도 없지. 그것과 마찬가지 이치라고 생각해라.
언젠가 철학과를 다니던 대학 선배가 내게 해주었던 말이다. 그 선배는 존재의 중요성을 공기에 비유했었다. 과연 그럴까? 내게 있어서 다인은 그런 존재일까? 단지 돈으로 거래된 사이일 뿐이고, 언제든 서로의 이익에 맞지 않으면 그만둘 수 있는 계약관계일 뿐인데 말이다.
두통은 이제 지끈거림을 넘어서 극도의 혼란으로 나를 끌어들인다. 항상 앉아서 일을 하던 책상이, 의자가 어느 날 갑자기 존재의 가치를 요구해 온다면 이렇게 혼란스러울까? 열 봉지의 팝콘을 한꺼번에 쏟아버린 방처럼 내 머릿속이 온통 어질러진 느낌이다. 스스로에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하고 있는데, 때마침 전화벨이 울려 극도의 혼란스러움으로부터 나를 구해주었다.
-여보세요?
수화기를 통해 들려온 것은 바로 다인의 목소리였다.
백산
수정일 2003년 04월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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