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이사람] (285) 신한생명 판매여왕, 관리자 대상에 이어 법인까지 차린 엄덕만
이보다 더 보험을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그녀 말고 또 있을까? 보험에 푹 빠진 여자 엄덕만(49). 보험에 ‘보’자도 모르는 전업주부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보험에 뛰어들어 보험 설계사로, 영업소장으로 화려한 실적을 올리며 인생을 대역전 시킨 주인공이다.
보험이 천직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그녀가 몇 년 전 또 하나의 ‘대형사고’를 쳤다. 잘나가는 신한생명 영업소장직을 그만두고 신우법인을 차려 나홀로 독립을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신한생명 보험설계사와 영업소장을 거쳐 아예 신한생명 상품만을 다루는 보험법인 대표로 변신한 그녀를 만나 보았다.
신우법인 사무실에 들어서니 그동안 보험을 하면서 받은 각종 수상 트로피와 상패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웠다. 그의 인생에서 보험을 빼고 나면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도 1990년 9월 충무로에 위치한 신한생명 중부영업국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하기 전까지는 평범한 전업주부였다.
신한생명에 다니던 친목회 언니를 통해 시험만 봐주면 추천인이 외국여행을 간다는 말에 그 언니를 보내주려고 시험을 치렀다. 하지만 다닐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시험을 치고 나니까 회사의 교육을 받아야 외국에 갈수 있다는 추천인의 말에 그 회사의 교육을 받았다. 한 달 간 교육 받는 중에 마음이 바뀌었다.
보험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었던 그가 한달교육을 받고 나서 보험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 전에는 별난 사람들만 보험을 하는 것으로 알았고 보험에 대해 극히 부정적이었는데 그 한달 교육에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러고 나서 일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모욕적인 언사와 냉대를 많이 받았다. 첫 계약을 하기 전까지는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내가 보험을 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 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약사님이 엄덕만씨가 하면 해주겠다고 했지만 날 믿고 보험을 들었다가 중도에 보험인 생활을 그만 두면 계약자에게 실없는 사람으로 비칠까봐 할까 말까 망설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계약자가 스스로 해준다고 하는데도 거절하는 게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그날 계약을 했다. 체결하고 나니까 마음이 하늘과 땅차이로 바뀌어 이제는 해야 된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서 바로 그날 그 계약을 체결하고 단골로 삼던 미용실에 달려가 원장한테 이제 보험을 해야 하니까 하나 들으라고 첫 권유를 했다. 그랬더니 첫마디에 들어줬다. 그 두 사람의 계약자가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두 사람의 계약을 바탕삼아 보험인이 된 그는 되돌아보지 않고 열심히 영업을 했다. 영업실적으로 올린 월급은 첫 달 48만원, 두 번째 달 64만원, 세 번째 달 120만원. 티끌모아 태산을 쌓아 나가듯 그렇게 4년 동안 그의 월급은 한번도 퇴보를 안했다.
보험인 생활 2년차 때 그가 속한 1반 팀 인원은 고작 3명. 그런데 마침 지구장이 승진케이스로 떠나면서 그에게 그 팀을 맡으라고 권유를 했다.
한 사람이 나가면 신입사원하고 둘밖에 안 남기 때문에 못하겠다고 했더니 소장이 팀을 아예 없애겠다고 했다. 내가 속한 팀이 없어진다는 게 스스로 용납이 안돼서 마음을 바꿔 무조건 하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1반에서 6반으로 맨 꼴찌 팀이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신입사원마저 그만 두는 바람에 나홀로 팀장이 되었다. 아침에 티타임을 하면 그날 들어오는 신 계약 보고도 해야 되고 지시도 받아야 하는데 그는 팀원이 없으니까 보고할 것도 없고 또 소장님이 지시할 것도 없었다.
팀원 없는 팀장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래서 증원을 하기 시작했다. 첫 달에 3명을 증원하고 두 번째 달에 또 두 명을 했다. 그런 식으로 인원을 늘려나가면서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팀을 계속 분할하여 6개 반을 만들어 내보내게 되었다.
팀을 계속 분할하면서 영업소도 덩달아 커져 그가 속한 중부 영업국 안에서 영업소를 3년 동안 4번이나 분할하게 되었다.
그런 노력으로 그는 보험인의 꽃인 전국 1년 연도상 시상식에서 첫해와 두 번째 해 연이어 장려상을 탔고 세 번째 해에는 1등인 금상을 탔다. 그리고 4번째 해에는 여왕상을 타게 되었다.
신계약과 증원 그리고 분할을 총 망라하여 복합적인 채점을 해서 보험인의 영원한 별인 ‘전국 여왕’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여왕상을 타던 해에는 1년에 직접 증원 도입을 29명까지 해봤다.
여왕상을 탈 때 급여는 1천5백만원. 첫 달 48만원의 급여가 4년만에 1천5백만원으로 껑충 뛰었다.
그러고 나서 만 4년만에 소장이 되었다. 처음부터 같이 있던 소장이 본사로 가게 되면서 그 영업소를 반으로 나눠 그중 하나를 맡으라는 권유를 받고 14명의 사원을 거느린 소장으로 발령을 받은 것이다. 그때가 94년 9월.
소장을 하면서 이력이 짧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노력으로 안 되는 것이 없는 법. 소장 1년 만에 인원을 40여명으로 키워서 우리 영업소 총무한테 분할을 해주었다.
보험설계사(FC) 시절 전국 연도상을 휩쓸었던 그의 화려한 수상 행진은 관리자가 되고나서도 계속 이어진다.
영업소장 첫해 우수상, 두 번째 해 최우수상 수상에 이어 세 번째 해에는 마침내 전국 530개 영업소 가운데 가장 빛나는 관리자 대상(大賞)을 탔다.
매달 주는 최우수 영업소 상을 휩쓸다 시피 하다 보니까 전국에서 1년에 한번 하는 관리자 대상을 거머쥔 것이다. 보험설계사 전국 여왕상에 이어 관리자에 올라서도 최고상인 대상을 탔으니 이보다 더 큰 영광이 또 어디 있으랴.

지금도 그는 그때 충무로 중부 영업국에서 같이 일했던 ‘세운 영업소’ 사원들이 많이 생각나고 또한 그들을 고맙게 생각한다.
화려한 영광 뒤에 어둠의 그늘이 있듯이 그는 몇 년 동안 최고를 고수 한다는 게 심적으로 큰 부담이 되었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지방의 작은 영업소를 자원해서 가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가서 보니까 전체 사원이 고작 5명뿐인데 그 중에서 실제로 일하는 사원은 3명밖에 없었다.
1등에 대한 강박관념을 피해서 갔는데 가서 보니까 3명밖에 없으니 기가 막혔다. 그만 두고 보따리 싸서 당장 올라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국장의 만류를 무릅쓰고 갔는데 여기서 다시 원위치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황무지에서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래서 3년 만에 38명까지 증원을 했다. 한사람의 신입사원을 영입하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했다. 말은 쉽지만 해내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면서 인근 도시에 혼자 힘으로 지소도 만들고 3박자를 뛰었다. 지방 영업소 소장을 하면서 지소를 두 군데 더 늘려 혼자서 세 군데의 영업소를 관리했다. 그런 피나는 노력 끝에 지방에 내려가서도 관리자 대상의 장려상을 탔다.
그러다 보니까 3년이 지나서 육신도 정신도 다 지쳤다.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좋아했던 보험회사를 떠나 보려고 사표를 제출했다. 그때가 2001년 4월.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보험법인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서 그해 11월에 다른 쪽의 경험을 쌓아보려고 레스토랑 겸 호프집을 차렸다. 보험과 가게를 겸업하면서 그는 자신이 가야 되는 길은 오직 보험의 길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래서 8개월 만에 가게를 정리하고 2002년 9월부터 새로 사무실을 내어 나홀로 보험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보험 법인에만 전념하고 혼자서 보험사원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그의 땀과 노력과 인생의 전부가 고스란히 담긴 신우법인은 그렇게 탄생하였다.
그가 세운 신우법인은 혼자 시작해서 지금까지 1년 동안 13명의 사원으로 늘어났다. 법인을 하면 여러 회사 상품을 다 취급할 수 있는데도 굳이 신한생명만을 고집하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신한생명은 모국(한국)에 무언가를 해주고 싶어 하는 재일 교포들의 작은 소망으로 1990년 3월에 세운 회사다. 재일 교포들로 이루어진 신한생명의 주주들은 회사에서 생기는 영업 이익금을 모국에 환원한다는 뜻이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
8개 후발 생보사 중에 IMF 위기이후 현재까지 합병이나 통폐합 없이 독자 생존한 생보사는 유일하게 신한생명뿐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기업평가에서 지급여력이 부족해서 증자명령이 떨어지면 임원들이 일본으로 갈 적마다 주주들은 그 모든 것을 자금 지원으로 해결해 주었다. 그 결과 지금까지도 신한생명은 내실이 탄탄한 생보사로 성장하고 있다.
그가 신한생명만을 고집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보험이 가지고 있는 가치와 신한생명의 기업 정신이 일맥상통한다는 것이 좋아서 지금도 그는 신한생명 상품만을 고집하고 있다.
그가 그동안 일을 하면서 얻었던 결과가 결코 그 혼자서 잘했다는 생각은 안 한다. 회사가 많이 도와주고 협조해주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신입사원으로 입사해서 지금까지 그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가 보험을 너무너무 좋아하고 신한생명을 사랑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보험은 뜻이 참 좋아요. 보험의 원 가치는 상부상조의 원리이고 사랑의 바탕 위에서 출발하지요. 누군가를 배려하지 않으면 결코 할 수도 없고 결코 들 수도 없는 것이 보험입니다.”
아주 불행한 일을 닥친 사람에게 개인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주 작은 것인데 그 사람이 살아가려면 너무 많은 것이 필요하다. 그때 그것을 채워주는 것이 여러 사람이 가입해서 만들어놓은 자원의 일부분인 보험금이다.
“가장 가까운 친척이나 형제라 하더라도 불행한 일을 닥쳤을 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생각을 해봤어요. 그랬더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더군요. 그럴 때 그것을 채워주고 배려해주고 위로해주는 것은 보험뿐이더라구요. 그래서 이 좋은 것을 세상에 많이 알려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에게 보험금을 지급한다는 것은 복지사업의 하나라고 그는 생각한다.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이 가족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재산 또한 보험이다. 자기가 없어지고 난 다음에도 그 가족이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자신의 몸으로 준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그래서 그는 보험인으로써 자부심을 굉장히 강하게 가질 수 있었고 어려울 때에도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다 보니까 계약자의 모든 생활 자체가 곧 내 생활이 되었고 뿐만 아니라 어려운 일을 당해도 고통을 함께 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보험을 알고 보면 그렇게 좋은데 우리나라 국민들은 아직도 보험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인 게 많아서 속상할 때가 많다는 그는 단편적인 것만 보지 말고 보험의 진짜 숨겨진 가치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보험에 대한 인식이 옛날보다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일선에서 영업을 하다 보면 아직도 부족함이 많은데 이것은 보험회사와 보험인들의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는 보험인으로 살아오면서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털어놓는다. 지금까지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출발해서 모든 것을 이루어냈다. 그러면서 가정적으로도 경제적으로 많이 풍요로워 졌다.
보험을 하면서 세상을 많이 배워나간다는 그는 신우법인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성공 시키고 싶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 지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보험에 가입한 계약자들이 불행한 일을 만나지 않고 살아가기를 그는 간절히 바란다. 그동안 계약자들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항상 감사하게 생각한다.
보험인으로 살아오면서 그동안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누구보다도 많이 받아온 그이지만 그에게도 원초적 아픔이 있다.
4살 때 엄마가 돌아가시고 미군 통역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숱하게 이사를 다니면서 어린 나이에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다.
시련은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법. 그는 언제 어느 환경에서나 꿋꿋하게 잘 적응하고 잘 견디어 나갔다. 그리고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꿈 만은 잃지 않았다.
수중에 달랑 2만원을 들고 패션학원에 등록하여 1년 과정을 마치기까지 눈물젖은 빵을 먹으며 겪었던 처절한 고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기숙사에 머물면서 돈이 없어 간장을 반찬 삼아 맨밥으로 1년을 버텼다. 그때 영양실조로 너무 마르다 보니까 양눈에 쌍꺼풀이 저절로 생겼다며 웃는다.
학원을 수료하고 부산 시온합섬(옛날 신앙촌)에 취직하여 2년간 있다가 거기서는 더 희망이 없다고 보고 21살 때 서울에 올라왔다.
허름한 월세방에서 추운 겨울에 연탄불도 못 때고 일자리를 얻기 위해 답십리에서 뚝섬까지 걸어 다니면서 며칠씩 굶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렵게 의류회사에 들어가 실력을 쌓아나갔다. 가장 밑바닥 미싱부터 시작하여 디자인까지 기본적인 것은 다해봤다. 에이전트 사무실에서 하청업체 인스펙터로 활동하는 등 거기서 능력을 인정받아 잘나가는 사람이 되었고 지금의 남편도 만났다.
의류계통에서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전문인으로 능력을 인정받기까지 올라갈 확률은 보험보다 훨씬 더 어렵다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그는 해냈다. 이 또한 피나는 노력의 대가이리라.
그러나 그는 보험이 자신의 천직이자 인생의 전부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는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의 가장 큰 재산은 사람. 매번 받아만 본 사람은 줄 줄을 모른다고 하는데 그는 그런 점에서 반대부분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제 자신이 어렵게 컸기 때문에 주위에서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뭐라도 주고 싶고 그러다 보니 인간의 정이 쌓이고 인맥형성이 잘 이루어져 이 자리까지 오지 않았나 싶어요. 결국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보험이거든요.”
내실보다는 포장지에 관심이 많은 세상인데 그는 포장보다는 내실에 충실하면서 있는 그대로를 참 좋아 한다.
“사람이 태어나면 누구나 선천적으로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매사에 기본적으로 충실하게 사는 자체를 타고 난 것 같아요.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고통을 고통으로 생각해 본적이 없어요.”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한다는 그는 자신이 가는 길만 묵묵히 가는 스타일이라고 말한다. 이것저것 쉬운 길을 가면 편할 텐데 그런 요령을 모른다.
“진짜 나눌 수 있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자선단체나 불우이웃에 쓰는 것만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저는 일상생활에서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과 나누면서 살아왔다고 자부해요. 그래서 돈을 많이 모으지 못한 것 같아요. 사실 벌기는 많이 벌었지만 그래서 못 모았어요.”
어렵게 돈을 벌면 아까워서 벌벌 떤다고 하는데 그는 그 반대다.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안 쓰려고 하는걸 보면 안쓰럽다. 경제가 어려우면 적절한 소비도 미덕인데 그것이 안타깝다.
예로 식당이 어려우면 그 식당에 가서 막 팔아주고 싶다. 그래서 식당도 잘되고 종업원도 살고 그 식당에 물건을 대주는 사람도 살게 해주고 싶어 한다.
그는 지금까지 살면서 누군가에게 실망은 안 시켜 줬다고 자부한다. 보험을 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그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보험을 들고 그 가정에 행복이 햇살처럼 가득해지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 그가 보험을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보험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행복을 심어주는 것이 바로 보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보험이 천직이자 인생의 전부인 여자 엄덕만, 그녀는 오늘도 그렇게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를 만나고 나서 기자도 보험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달라졌다. 세상 사람들에게 불행을 막아주고 어려울 때 힘이 되어주는 ‘행복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보험인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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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pkorea.co.kr>
2003년 11월17일 09시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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