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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서] 첫 눈에 대한 어떤 기억
2008/02/19 00:00
입력 조회수 : 40
필자가 한 때 자취를 했던 그 동네엔 A와 B라는 동갑나기 친구가 있었다.
둘다 그림에 소질이 있고 화가를 꿈꾸고 있다는 점은 같았지만
두사람의 형편은 크게 달랐다.
부유한 가정의 A는 독선생을 두고 그림 공부를 한 끝에 미대에 들어갔고
부모님을 여의고 여동생 까지 돌봐야 했던 처지의 B는 진학의 꿈을 접어야 했다.
물감 살 돈조차 없었던 B는 그 동네의 극장에서 간판 그리는 일을 하며 그림에 대한 갈증을 달랬다.
각자 그 동네를 떠나서도 세 사람은 자주 만나며 인연의 끈을 이어갔다.
그렇게 몇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셋의 처지는 달라져 갔다.
필자가 출판관련 문화원의 봉급쟁이가 되는 사이
A는 고등학교의 미술선생으로 있으면서 꾸준히 국전에 출품작을 내고 있었고
대학을 가지 못한 B는 변두리 극장의 영화포스터를 그리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었다.
이따끔 같이 모이는 자리는 늘 그림에 대한 이야기가 주제였다.
A가 이야기를 주도하고 그림에는 문외한이었던 필자는 늘 듣는 입장이었다.
거침없는 성격의 A는 술자리가 무르익을 수록 열변을 토하곤 했다.
그 단골 메뉴가 예술론이었는데
이를테면, 행위자체가 목적이 아니면 예술이라고 볼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같은 그림을 그리더라도 그림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자신에 비해
보여 주기 위해서 그리는 B의 그림은 직업 행위이지 예술이 될수 없다는 논지였다.
이야기가 그쯤에 이르면 불편하게 느껴진 필자가 애써 화제를 바꾸곤 하였지만
정작 이해가 안가는 것은 B의 태도였다.
비록 대학은 안 나왔지만 필자 보기엔 그림이 A에 비해 처지지 않고 눌변도 아닌 B는
반박의 기미조차 없이 끝까지 조용히 듣는 입장이었다.
그쯤에서 A의 열변이 멈추기를 바라는 필자와는 달리 B는
한마디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주사에 가까운 말들을 싫은 표정도 없이 끝까지 들었다.
그렇게 반갑게 시작하여 불편하게 마무리 되는 만남의 다음날이면
두 사람에게 전화를 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술이 깬 뒤에 후회하고 있는 A에게 이야기의 각을 좀 둥글게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면
뒤끝이 없는 그는 B의 처지가 딱하고 화가 나서 그랬나 보다며
다음에는 그러지 않겠노라며 분명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면서 미안해 했다.
B에게 전화를 할 때면 필자 스스로 괜히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렇지만 대범한건지 무딘건지 B는 언제나 마음 상한 것 전혀 없다는 투였다.
A의 질책을 통해서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들을 채우게 된다며 오히려 A가 고맙다는 말로
오지랖 넓게 걱정하는 필자를 머쓱하게 만드는 B였다.
그러던 어느 겨울 첫눈 오는 날이었다.
B가 근무하는 극장의 사무실에서 셋이 모이기로 약속이 정해졌다.
퇴근시간을 기다렸다가 약속장소로 가다 보니 눈송이가 점점 탐스러워졌다.
발목이 빠질 만큼 온천지를 하얗게 덮고도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눈속을 뚫고 극장이 보이는 사거리 모퉁이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다가 보니
길거너 극장 앞에 한 남자가 못 박힌듯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A였다.
머리와 어깨에 눈을 잔뜩 얹은 채 B가 그린 극장의 영화간판을 올려다 보고 있었는데
얼마나 넋을 놓고 보고 있는지 필자가 다가갈 때 까지 미동도 없었다.
"뭘 그리 뚫어져라 보는건가? 감기 걸리겠는 걸"
다가가서 어깨를 툭치며 말을 걸었더니 그가 탄식하듯 말했다.
"부끄러워...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 가 없어."
"이 사람아, 무에 그리 부끄럽다는 겐가"
"저 여주인공의 눈 좀봐.
마치 살아있는 것 처럼 뛰쳐 나와서 눈물을 쏟아 낼것 같지 않은가.
난 몇번을 죽었다가 깨어나도 저렇게는 그릴 수가 없어."
A의 손 끝엔 오래 전에 필자도 개봉관에서 보았던 The Last Concert라는 영화의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여느 극장의 그림과는 분명 다른 충격이 와 닿았다.
주인공 파멜라 빌로레시가
집으로 돌아 오다가 피아노 소리를 듣는 순간 웃으며 눈물짓는 장면이었는데
까만 눈망울이 너무도 선연하고 그 눈가에 맺힌 눈물이 맑다 못해 영롱하기 까지 하여서
금방이라도 톡하고 굴러 떨어질 것만 같았다.
"내가 시덥잖은 이론을 들먹이며 예술을 논하는 사이에
저 친구는 영혼으로 그림을 그렸었나 봐.
안봐도 알것 같아. 저런 그림을 그리기 까지 그 친구가 얼마나 고뇌했을지...
그런 친구를 어줍잖은 지식으로 닦달했던 내가 너무 부끄러워..."
같은 사람들 끼리 만났지만 그날의 만남은 여느 때와는 분명 달랐던 듯 싶다.
미안해 하는 A에게 술잔을 내밀며 B가 말했다.
"알다시피 난 체계적인 공부를 못했기 때문에 그림의 이론에 대해서는 백지나 마찬가지라네.
내가 아는 거라고는, 보이는 것만을 그려서는 그림이 될 수 없다는 것 하나 뿐이지.
장미를 그릴 때면 살아 있는 느낌의 장미를 그리고 싶어서
뿌리를 수십가닥으로 쪼개 보며 장미가 아름다울 수 있는 힘을 칮아보곤 했지.
고개를 들지 못하는 A에게 술을 권하며 그는 말을 이었다.
"늘 이론에 대한 갈증이 깊었는데 자네가 많이 채워 줬어.
예술이 목적이어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생활수단으로 삼아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씁쓸하기도 했지만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자네가 늘 고마웠어. 고맙네."
그날의 그 자리가 특별하게 느껴졌던 것은 꼭 첫 눈이 와서만은 아니었다.
서로를 이해하고 하나 된 듯한 느낌에 기꺼워진 셋은 밤새도록 내렸던 첫 눈 처럼
아침까지 유쾌하게 술잔을 기울였고 깨어서 취한 채 함께 맞았던 아침은 상쾌했다.
그리고 얼마 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둘은 나란히 국전을 통해 화가의 꿈을 이루었다.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자양분을 제공하였음은 따로 이야기 할 필요가 없겠다.
다시 겨울이 오고 첫눈이 내렸지만 두 사람은 이제 이 땅에 있지 않다.
A가 먼저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B는 여동생을 사고로 먼저 보낸 후 프랑스로 떠나 갔다.
눈이 올 때면 그날의 그 술자리와 함께 지금은 연락이 끊어진 두 사람이 떠 오른다.
그리고,
장미가 아름다울 수 있는 힘을 알기 위해 뿌리까지 수십가지로 쪼개어 보았다는 B의 말은
시인과 기자의 허울을 쓰고 앉은 필자에게는 지금도 화두처럼 남아 있다.
박태준
grinbi@grinbi.kr
2005년 11월 26일 23:32
[
피플코리아
ediapr@hanmail.net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hsshss292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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