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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젖어있는 열한개의 소품] (35) 이야기 둘 (7)
2005/12/20 00:00
입력 조회수 : 719
◇웨딩드레스 -돈으로 거래 된 사랑 7
"죄송해요. 주제넘은 말을 해서..."
'지금'이라는 단어가 주는 묘한 무게감으로 인해 잠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더니 화가 난 것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아, 아니야. 다인 말이 맞는데, 뭐?"
나는 조금 과장 된 제스추어를 취하며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감싸안아 주었다.
"폼나게 데이트 한번 해볼까? 어린놈들 기가 팍 죽도록 말이야."
내 말에 힘을 얻은 듯 그녀의 표정도 곧 밝아진다.
"네!"
그녀는 내 허리를 껴안고, 나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보란듯이 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니 진짜 연인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녀는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고 내 기분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
"저기 악세사리 파는 곳이 있어요."
그녀가 가리킨 곳은 싸구려 모조품 몇 가지를 진열해 놓고 있는 작은 노점상이었다.
"저기서 사겠다고?"
"머리띠는 원래 저런데서 사는 거예요."
"이봐, 나는 지금 보너스를 주려는 거야. 그런데 겨우 일이천 원하는 머리띠 하나로 끝내자는 거야?"
"복잡하게 자꾸 따지지 말고 어서 머리띠나 하나 골라줘요."
"나, 참..."
그리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성화를 이길 수 없어 머리띠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원체 싸구려만 모아놓은 곳이어서 눈에 차는 것이 없을 줄 알았는데 찬찬히 살피다 보니 의외로 괜찮은 것들이 많아서 금방 서너 개를 고를 수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이것들이 괜찮은 것 같은데...?"
뭐에 정신이 팔렸는지 그녀는 내 말도 알아듣지 못한 채 길 건너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하여튼 여자들이란......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의상실 윈도우에 진열되어 있는 웨딩드레스였다. 조명을 받아 새하얗게 빛나고 있는......
"가까이 가서 구경 해볼까?"
흠칫! 그녀는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화들짝 놀라더니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에요. 벌써 다 봤는 걸요, 뭐."
"뭐, 어때? 가까이서 본다고 돈 받는 것도 아닐 텐데."
내가 손을 잡아끌자 그녀도 못이기는 척 뒤를 따랐다.
길 건너에서도 충분히 느끼기는 하였지만 가까이에서 보는 웨딩드레스는 정말로 화려했다.
"영화에서 몇 번 보았을 뿐, 이렇게 가까이에서 구경하는 건 처음이에요."
"아주 들어가서 구경하는 게 어때?"
"살 것도 아니면서 구경만 하면 욕하잖아요."
"그런 게 어딨어? 구경하는 사람마다 다 사기로 하면 이 가게 주인은 하루에도 수억씩 벌겠네."
나는 한사코 싫다는 그녀를 억지로 끌며 의상실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종업원이 반갑게 인사를 하며 달려나오기에 다인을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이 아가씨한테 웨딩드레스 구경 좀 실컷 시켜주시오."
"네, 손님."
"진석씨..."
장난 그만하고 자신을 어서 데리고 나가 달라는 듯한 눈길을 보내고 있는 다인의 모습이 재미있어서 한마디 덧붙여 본다.
"아, 그리고... 맞는 싸이즈가 있는지도 알아봐 주시오."
"오늘 당장 입으시게요?"
이번엔 종업원이 놀란 눈으로 되물어온다.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그럼, 혹시... 예상하고 계시는 가격대는..."
"가격은 상관없소."
"알겠습니다, 손님."
택시에서 내려 집으로 올라가고 있는 그녀의 표정이 실로 복잡다단하다. 샐쭉한 것이 화가 난 것도 같고, 입술 끝이 자꾸 들려 올라가는 것이 좋은 듯도 하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웨딩드레스를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한다는 사실이다. 그다지 무겁다고 할 수는 없지만 부피가 꽤나 커서 여자가 들기에는 쉽지 않은 물품인데도 굳이 제 손으로 들고 가려는 것을 보면 말이다.
"너무하셨어요. 백오십만 원씩이나 하는 웨딩드레스를 막무가내로 사주시고..."
"보너스로 주는 선물이라고 했잖아."
"제가 받기에는 너무 비싼 선물이에요."
"다인에게는 그럴지 몰라도 내게는 아냐. 나는 하루 저녁 술값으로도 그 이상을 쓸 수 있는 사람이니까."
대꾸 할 말이 없는지 다인은 현관 앞에 도착 할 때가지 아무 말도 않더니 문을 따주자 얼른 제 방으로 뛰어 들어간다.
"뭐야, 이거? 선물까지 사줬는데 고맙다는 말 한 마디 듣지도 못하고..."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거실에 혼자 남겨진 나는 소파에 몸을 묻고는 유선 채널을 이리 저리 돌려보았다. 마침 볼만한 영화를 해주는 곳이 있어서 들여다보고 있는데 등뒤가 갑자기 환해지는 느낌이 든다. 굳이 고개를 돌려보지 않아도 다인이 드레스를 입고 나왔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참 예쁠 것이다. 이렇게 생각은 했지만 막상 돌아보니 이건 상상 이상이다. 그동안은 그저 순박한 연변 교포로만 알고 있었던 다인이 이렇게 달라보리 수도 있었나,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너무나 잘 어울렸다. 그녀가 이 웨딩드레스를 입기 위해 태어났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이 웨딩 드레스가 그녀를 위해 존재한다고 해야 할까? 도무지 입을 다물 수가 없다. 옷이 사람을 저렇게 달라 보이게 할 수 있다니...
"이... 상... 해요?"
내가 아무 말 없이 바라보는 것이 불안했던지 말을 더듬는 그녀의 눈빛이 사뭇 걱정스럽다. 이럴 땐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너무 아름답다고 사실대로 말할까? 아니면 시침 뚝 떼며 촌스럽다고 면박을 줄까?
"역시 저에겐 이런 고급 옷이 안 어울리죠?"
내가 잠시 머리를 굴리는 사이 그녀는 지레짐작으로 시무룩해져 버린다. 이러면 사실대로 얘기 해주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아니, 아주 잘 어울려."
"정말이요?"
"그래, 너무 잘 어울려서 탈이지."
"잘 어울리는 데 왜 탈이나요?"
"자꾸 안아주고 싶은 생각이 나니까."
"네?"
놀라고 있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든다. 그리고 드레스가 구겨진다고 걱정하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침실로 들어간다. 오늘밤도 그녀의 심연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야 할 것 같다. 하얀 드레스가 잘 어울리는 그녀의 심연 속으로...
백산
수정일 2003년 02월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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