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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젖어있는 열한개의 소품] 이야기 하나 (21)
2005/09/28 00:00
입력 조회수 : 769
◇까만색 반부츠-누군가를 대신한 사랑 21
순수함, 혹은 해맑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재민이의 매력에 푹 빠져버린 저는 당신께 묻고 싶었던 말을 뒤로 미룬 채 아이를 따라 주방을 나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정말 너무나 큰 실수였습니다. 어째서 그때 묻지 않았을까요. 만약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면... 아쉬움이 남을 뿐입니다.
하긴... 세상일이란 것이 의례 그런 법이지요. 이때인가 싶으면 이미 지나간 뒤이고, 늦게나마 쫓아가려 해도 시간의 갭은 한 치도 좁혀지지 않는... 아니, 지나간 시간은 영원히 극복할 수 없다는 말이 옳겠지요.
당신의 방은 깔끔했습니다. 평소 보았던 당신의 성격을 그대로 옮겨 놓은 느낌이었지요. 새하얀 시트가 단정하고 한쪽에 개어 있는 홑이불이 가지런한, 그래서 폭신 뛰어들어 눕고 싶은 침대가 놓여 있었고, 그 곁에는 다음날 입기 위해 미리 다려 놓은 듯 반듯하게 날이 선 와이셔츠와 양복이 벽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창가에는 정돈이 잘 된 책상이, 그 옆에는 고전명서(古典名書)를 비롯해 첨단 학술서적까지 망라(網羅) 된 책꽂이가 놓여 있었습니다. 사오백 권은 족히 될 그 책들에는 수많은 견출지가 붙어있고, 손때가 잔뜩 묻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단지 전시용은 아닌 듯 했습니다.
당신의 해박한 지식이며, 부드럽고도 막힘 없는 언변이 어디서 나오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방을 둘러보고 있으려니 재민이가 두터운 사진첩을 꺼내 주더군요.
"우리 식구는 이 안에 다 있어요. 지금은 없는..."
재민이는 말을 하다 말고 문득 제 눈치를 보더니 끝을 얼버무렸습니다. 하지만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분명 '엄마도 볼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겠지요. 어린 나이라고는 해도 초등학교 삼 학년 정도 되면 어른들의 일도 대충은 짐작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재민이는 제 앞에서 엄마 이야기를 꺼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어쩌면 사진첩을 다시 꽂아두고 싶은 심정이었을 지도 모를 일이지요.
"그럼 이 안에 엄마 사진도 있겠구나?"
저는 일부러 이렇게 말하며 사진첩을 받아 들었습니다. 물론 당신의 옛 부인 모습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이제 열 살밖에 안 된 어린 나이에 엄마에 관한 말을 스스로 자제하는 재민이의 모습이 안쓰러웠기 때문입니다.
부인께서 참으로 고우시더군요. 화려한 외모는 아니지만 수수하면서도 어딘가 기품이 엿보이는...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과 잘 어울리는 분이란 느낌이 들었습니다.
두 사람의 연애시절부터, 결혼식, 신혼여행, 재민이의 갓난 시절, 그리고 병색이 완연한 모습까지...
무려 다섯 권이나 되는 사진첩을 하나하나 보고 있자니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이 사이에 내가 끼여들 수 있을까?'
그리고 왠지 허물 수 없는 세 사람만의 공간이 존재해서, 저는 단 한 발짝도 들여놓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막연한 불안감까지 일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이미 각오가 되어 있었기에 불안감을 애써 눌러 둘 수 있었습니다. 당신과 저는 애초부터 평범함의 범주 밖에서 시작된 관계였으니까요.
'어차피 그 안에는 내가 없었어. 이제 그 추억 위에 우리만의 추억을 다시 쌓아 올리면 되는 거야.'
저는 사진첩을 덮어두고 재민이를 찾았습니다. 이제 재민이의 방을 구경할 차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사진을 본 시간이 너무 길었던 탓인지 재민이는 방안에 없었습니다.
아마도 아빠가 요리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거나 공룡 모형을 가지고 놀고 있었던 것이겠지요. 아이들이란 원래 무료한 기다림을 지속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저는 사진첩을 제자리에 두기 위해 책장을 살폈습니다. 가장 밑 칸에 빈 공간이 보이더군요. 그곳에 사진첩을 꽂아 넣고 일어서려 할 때였습니다. 뭔지 확실치 않으면서도 제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습니다.
맨 밑에 칸 중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꽂혀있는 그것은 매우 익숙한 글씨체로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그리운 당신에게...>
백산
수정일 2002년11월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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