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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젖어있는 열한 개의 소품] 이야기 하나 (13)
2005/07/15 00:00
입력 조회수 : 745
◇까만색 반부츠-누군가를 대신한 사랑 (13)
말은 '노력'이라고 했지만 당신의 말투는 어느새 바뀌어 있었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어색한 느낌이 들기는 했습니다만 항상 조용하기만 한 당신의 성격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커다란 변화였지요.
하지만 저는 여전히 당신의 이름을 부르기가 어려워 마음속에 있는 말을 뱉어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참 우스운 일이었지요. 당신은 그렇게 쉽게 해냈는데 저는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 때문에 마음속에서만 맴돌고 있던 그 말은 메아리를 거듭해 점점 큰 소리로 제 머리를 뒤흔들고 있었습니다. 이런 심정의 변화를 알아차리셨던 걸까요? 당신은 움직임을 멈추며 넌즛한 눈길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술 한잔 더 하겠소?"
저는 그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그러자 당신은 저의 한쪽 팔을 조심스럽게 잡고 소파로 인도했습니다. 마치 제가 손님이고 당신이 주인인 것 같은 착각이 들더군요. 저는 자리에 앉자마자 반쯤 담겨 있던 술을 단숨에 마셔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잔 따르려하자 당신이 제 손을 잡아 제지시켰습니다.
"급한 술은 몸을 상하기 마련이오. 천천히 듭시다."
저는 서운한 눈길을 당신에게 던졌습니다. 온 몸을 달구는 술기운, 그리고 잔잔하게 실내를 휘감으며 분위기를 이끌어내고 있는 제랄드 졸링의 노래는 가슴속에서 마구 요동쳐대고 있는 그 말과 함께 저를 혼돈으로 몰아가고 있는데 야속하게도 당신은 모른 척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서운한데 술까지 마시지 말라니요... 저는 당신의 손을 가볍게 뿌리치며 잔을 다시 채웠습니다.
"취하고 싶어요."
당신도 더 이상은 말리지 않았습니다. 그저 걱정스러운 눈길을 던지고 있을 뿐이었지요. 저는 연거푸 석 잔의 술을 마셨습니다. 이미 상당히 취한 상태였기 때문인지 위스키의 자극이 그리 독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맛없는 물을 마시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지요.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혀에서 전해지는 미각이었을 뿐, 감각과 함께 이성을 마비시키는 알콜의 기능까지 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연거푸 마셔댄 위스키의 효과가 유감 없이 발휘되기 시작했습니다.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몸이 자꾸 기울어지고, 뭔가 말은 하고 있는데 저 자신도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요.
이렇게 술기운을 통제하기 힘들어지자 술이 저를 통제하기 시작하더군요. 점점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도 제 손은 습관적으로 잔을 채우고, 또 비우기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몇 잔이나 더 마셨을까요? 제 의식은 술기운에 대부분 잠식당했고, 이성은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해 갔습니다. 그런 와중에 당신에게 뭐라고 주절거리면 그때마다 당신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대꾸를 해주었고, 건배를 제의하면 같이 술잔을 마주쳐 주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알콜이 인도하는 무의식의 세계로 빠져들고 말았지요.
타는듯한 갈증에 시달리던 저는 화닥 놀라 눈을 떴습니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기억에 전혀 없건만 제가 누워있는 곳은 침대였습니다. 눈을 돌려 찾아보았지만 당신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홀로 덩그마니 누워있는 방안은 칠흑처럼 어두웠고 주변은 온통 적막으로 가득 차 있는데, 어렴풋이 떠오르는 머릿속의 영상은 제 시야를 혼란시키고 터질 듯 요동치는 심장소리는 고막을 마구 뒤흔들고 있었습니다.
"꿈인가? 아니면 정말로..."
아득한 저편에 자리잡고 있는 기억의 편린 때문에 저는 너무도 혼란스러웠습니다. 도막도막 끊기며 떠오르는 그 영상은 당신과 함께였습니다.
백산
수정일 2002년9월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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