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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젖어있는 열한 개의 소품] 이야기 하나 (10)
2005/07/02 00:00
입력 조회수 : 669
◇까만색 반부츠-누군가를 대신한 사랑 (10)
결혼기념일 하루 전날이었지요. 일터로 나가기 위해 새벽잠을 깨보니 그 사람이 머리맡에서 미소짓고 있더군요. 아마도 수를 마무리짓느라 한 잠도 안 잔 것 같았습니다.
퀭한 눈에 실어 보내는 그 처연한 미소 앞에서는 나무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습니다. 쏟아지려는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나는 쫓기듯 집을 나서야 했지요.
당신의 볼 위로 드디어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고, 저 또한 눈물을 주체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날은 좀 더 힘든 대신 일당이 많은 일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미친 듯이 일을 해치웠습니다. 덕분에 좀더 이른 시간에 일을 마친 나는 동대문시장으로 향했습니다. 그 사람이 반 부츠를 신고 싶다는 말을 언젠가 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모아두었던 돈과 그 날 일당을 모두 합해보니 12만원 정도가 되더군요. 제철이 아니어서 모두 재고상품뿐이었지만 가진 돈과 눈높이를 모두 충족시키는 물건을 고르기 위해서는 이곳저곳을 수없이 기웃거려야 했습니다. 그렇게 세 시간이나 돌아다녀서야 마음에 드는 부츠를 겨우 만날 수 있었습니다. 새까만 가죽에 연갈색 털을 두른...
여기까지 말한 당신은 위스키 두 잔을 연거푸 비웠습니다. 저도 두 잔을 마셨습니다.
점원은 가진 돈 전부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 돈으로 꽃 한 송이와 자그마한 케익 하나, 그리고 아들놈에게 줄 후라이드 치킨 몇 쪽을 사야했기에 점원에게 통사정해서 만오천을 깎았습니다.
당신과 저는 다시 한 잔씩 마셨습니다.
사람의 행복이란 그렇게 자그마한 것에서 오는 모양입니다. 초라하나마 선물 몇 가지를 양손에 든 내 마음이 잔뜩 들떠 있었던 것을 보면 말입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케익 상자에 부대끼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울려내는 쇼핑백의 소리며, 살며시 풍겨 나와 군침을 돌게 만드는 후라이드 치킨의 냄새까지... 비닐하우스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오늘 저녁만큼은 누구보다 행복하게 보내리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저만치 비쳐 나오는 비닐하우스의 희미한 불빛 아래 아들놈이 쪼그리고 앉아 훌쩍거리는 모습이 보이는 순간, 하늘이 무너지고 있음을 온 몸으로 느껴야 했습니다.
당신의 얘기는 거의 끝나가고 있는 듯 했습니다만, 가슴의 허전함은 더욱 깊어져 우리 둘은 끊임없이 술잔을 비워내고 있었습니다.
아빠... 엄마가 아까부터 아무 말도 안 해... 아들놈이 이렇게 말하며 울먹이더군요. 어리다고는 하지만 제 어미가 죽었다는 사실을 왜 몰랐겠습니까? 단지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겠지요.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아내는 이불더미에 비스듬히 기댄 채 앉아 있었습니다. 아직 봐야 할 사람이 남아 있어 눈을 감지 못하겠다는 듯 공허한 눈길을 허공에 던져 둔 채 꼭 쥐고 있는 두 손에는 장미가 수놓아진 넥타이가 들려 있었습니다. 울고 싶은데 눈물이 나오지 않더군요. 대신 주변의 모든 것들이 면도날이 되어 온몸을 저며 올뿐이었습니다.
당신의 눈에는 더 이상 눈물이 고여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열 배는 슬픈 고뇌가 겹겹이 쌓여 있었습니다.
백산
수정일 2002년 8월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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