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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생활 시리즈] 나도 할말있다 제23탄
2004/09/15 00:00
입력 조회수 : 619
-억세게 재수없는 왕고참-
군대라고 다같은 군대가 아니다. 보직을 잘못받으면 지옥보다 더 고통스럽고 잘받으면 그만큼 편하다. 나는 억수로 군대운이 없었다. 전방으로 끌려온것도 억울한데 엎친데 겹친 격으로 군기와 규율이 엄격하기로 악명높은 부대에 배치받은 것이다. 졸병생활에 어느정도 익숙해질 즈음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말이 살찌고 하늘은 높아진다는 계절. 산속 깊은 곳에 파묻힌 부대.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너무나도 아름다운 절경이었다. 비록 허름하고 낡은 단층 막사였지만 주변경관과 어우러져 한폭의 그림같았다. 있는 자연 그대로 사진틀에 담아 고향 부모님께 보내고 싶을 정도로….
안개구름 뒤덮인 산자락위로 불쑥 솟아오른 산봉우리. 구름을 뚫고 솟아오른 하늘아래 최고봉 히말라야가 이보다 더 멋있을까? 부대주변에 온통 하늘거리는 코스모스가 운치를 더해 주었다. 단풍으로 불타는 듯한 내설악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하였다. 그속에 내가 있다. 생각만 해도 전율이 흐를정도로 아름다운 비경이다.
그러나 그때는 정말 몰랐다. 비경을 감상하고 즐길 여유가 한푼어치도 없었기 때문이다. 혼자 보고 즐기기 아까울정도로 천하절경의 대자연속에서 졸병인 우리는 혹독한 기합과 훈련과 구타에 시달리며 지냈던 것이다. 단풍철이 되면 몰려드는 관광인파로 교통이 막히고 인산인해를 이루는 현장에서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가을이 되면 향수병에 시달리는 사병들이 부쩍 늘어났다. 하지만 군대이기에 참아야 했다. 참는 길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향수병에 걸린 고참들은 탈출구를 찾으려고 졸병들을 괴롭혔다. 잔인하고 무지막지하게 몽둥이 찜질을 하였다.
그날도 비상이 걸렸다. 분계선을 넘어 인근 사단으로 공비가 침투했다는 것이다. 우리부대로 직접 뚫고 들어온 것은 아니지만 철통같은 경계로 사로잡으라는 작전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초저녁이었다. 해가 늦게 떠서 일찍 지는 심심산골이기에 초저녁이라도 주변은 이미 어스름이 짙게 깔려 어두어지기 시작했다.
부대 행정반 앞에 달려 있는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비상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모두 총알같이 연병장으로 집합했다. 물론 완전군장이었다. 공비가 언제 이곳에 나타날지 모르니 사주경계를 철통같이 하라는 명령이 하달 되었다.
바로 그때. 전부대원이 초긴장한채 완전군장 집합한 연병장을 가로질러 가는 물체가 있었다. 사람이었다. 우리는 혹시 간첩이 아닌가 바짝 긴장했다. 전부대원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쏠렸다. 부대장이 그것을 놓칠리가 없었다. 그러나 알고보니 제대를 하루 앞둔 왕고참이었다. 당장 거기 서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고참사병이 달려갔다.
그러나 고참은 그런 부대장의 말을 들은둥 만둥 그냥 가던 길을 계속 가는 것이었다. 아예 한술 더떠 유행가를 크게 불러대며 의기양양 하였다. 고참은 부대앞의 개울로 몸을 씻으러 가는 중이었다. 수건을 어깨에 둘러맨체 한손에 세면도구를 들고 있었다. 군복은 벗어제친 런닝셔츠 바람이었다. 부대장이 외치는 소리에 왕고참은 휙 고개를 돌아보며 “누가 잠자는 왕고참의 코털을 건드려, 누구야” 하고 한마디 내뱉었다.
술에 취한 목소리였다. 왕고참이었기에 모든것을 열외받았던 평소대로 행동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날은 예외가 없었다. 공비 침투로 비상이 걸려 전부대원이 완전군장에 연병장 집합인데 술취해 비틀 비틀 갈자 걸음을 걸며 돌출행동을 한 것이다. 우리는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것 같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부대장을 바라보았다.부대장이 단상에서 뛰어내려가 고참에게 달려갔다. 그때부터 잔인한 구타가 시작되었다. 내일이면 제대하는 말년 고참을 군화발로 무지막지하게 짓밟는 것이었다.
고참은 나뒹굴었다. 데굴데굴 굴렀다. 온몸을 짓밟으면 한번 굴렀다. 그렇게 고참은 군화발을 피하려고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면서 굴러갔다. 구르는 대로 부대장은 짓밟으면서 따라갔다. 저러다 사람 하나 잡지 싶었다. 고참은 구르고 부대장은 밟으면서 연병장을 한바퀴 돌았다. 움직이지 않았다. 죽은 것처럼 꼼짝도 안했다. 그래도 분이 안풀렸는지 부대장은 한참을 짓밟아댔다. 짓밟아 대면서 지휘봉으로 사정없이 내리쳤다. 때리면서 짓밟는 부대장은 이미 사람이 아니었다. 보다 못한 선임하사가 제지하려 했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부대장은 미친사람처럼 마구 밟아댔다. 부대장은 결국 제풀에 지쳐서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내무반으로 들어가 버렸다.
부대장에게 그렇게 얻어맞아 인사불성이 된 왕고참은 결국 들것에 떠밀려 내무반으로 옮겨졌다. 불쌍한 왕고참. 평소같으면 모든 일정에서 완전 열외를 받았는데 그날은 억세게 재수없는 날이었다. 군대를 늦게 왔는지 나이도 28살이나 된 할아버지 병장이었는데… 사회에서라면 부대장보다도 나이가 많아서 오히려 왕고참이 형님뻘인데 군대이다 보니 그런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 고참은 하루를 끙끙 앓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제대를 하였다.
왕졸병이었던 나는 고참이 그렇게 얻어맞고도 죽지 않은 것을 보고 인간의 목숨이 약할때는 한없이 약하지만 강할때는 말도 못하게 강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군대에서는 재수없게 한번 잘못걸리면 찍소리 한번 못하고 이렇게 얻어맞을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음에 이야기 계속됩니다.
김명수
2000/02/10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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