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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라는 이름으로 제353호] 아버지의 일기장...
2007/07/08 00:00
입력 조회수 : 1,052
얼마 전 친정 아버지의 생신 날이었는데 아버지를 뵈러 가지 못했다. 어버이날과 겹쳐 버려 시어머님께 가야 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친정부모님이 한번 다니러 오신다고 했기에 가질 않았다.
다른 형제들이 모여 조촐하게 아버지의 생신을 지낸 다음날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아버지 생신 날 모인 형제들의 이야기와 아침에 훔쳐본 아버지의 일기장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다.
(2005년 5월 8일. 오늘은 내 생일이자 어버이날이었다. 큰아들과 작은 아들내외와 작은딸 내외가 모두 모였는데 ........)중략.
일흔을 넘기신 친정아버지는 아직도 일기를 쓰신다. 작은 일 하나라도 메모하시는 습관을 가진 아버지는 일기를 쓰고 엄마는 다음날이면 아버지가 쓰신 일기를 훔쳐 읽는 것이 두분에겐 하나의 일상처럼 되어버렸다.
고등학교 때의 일이다. 대학교에서 주최하는 전국고교생 백일장에 참가하여 부상과 트로피를 받아들고 늦은 시간 추적거리며 쏟아지는 비를 맞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날 아버지는 무슨 일이 있으신건지 술을 많이 드시고 계셨다.
아버지는 술은 좋아하시지만 술을 드시고 나서 술취한 당신의 모습을 자식들한테 보여주지 않으려고 숨듯이 들어가 주무시는데 그 날은 주무시지 않으시고는 "축하한다 .. 우리 딸..
이 좋은날에 아버지가 술이 취해 미안한데 오늘은 마음이 많이 괴로워서 술을 마셨다. 지금 이 아버지의 괴로운 마음을 우리딸이 글로 좀 써줬으면 좋겠는데 ...하시며 딸앞에서 처음으로 눈물을 보이셨다.
그 날 밤 자식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시고 잠자리에 드셨던 아버지가 이른 새벽에 일어나 일기를 쓰고 계신 것을 나는 보았다.
그리고 그날밤에 흘린 아버지의 눈물이 할머니와 엄마사이의 고부간의 갈등때문이었다는 것을 딸아이를 낳고 서른을 넘기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늦은 밤 뒤뜰에 혼자 앉아 그 동안 모아둔 일기장을 모두 태우고 계신 아버지를 보면서 알게 되었다.
그 날이후엔 절대 일기는 쓰시지 않을것 같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아버지는 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하셨다.
직장때문에 어릴때 잠깐 친정에서 자란 딸애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던지 "엄마! 할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되었는데 일기를 쓰신다" 했던 적이 있다.
하루를 보내며 아버지만의 비밀을 적어둔 일기를 엄마가 자꾸 훔쳐본다는 것을 눈치챈 아버지는 어느날 커다란 자물통을 사다가 서랍을 잠갔지만 엄마는 다음날 바로 열쇠 아저씨를 불러 아버지의 열쇠를 복사해버렸다.
그런것을 알리 없으신 아버지는 여전히 일기를 쓰시고 엄마는 아버지의 일기장에 담긴 비밀을 딸들인 우리에게 전해주신다.
어린시절 식구들이 모두 잠든 늦은밤에 모나미 볼펜으로 하루의 일과를 적어 나가는 아버지의 등을 자주 봤지만 그땐 아버지의 일기장에 대해서 궁금해하거나 아버지가 일기를 쓰고 계신다는 것 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자랐는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일년에 한,두번 친정에 다녀올때면 굳게 잠겨 있는 아버지의 서랍이 궁금해진다.
자식을 결혼시킬때의 감정들과 손주가 태어났을때의 그 기쁨..등
오늘 같이 햇살이 좋은날에 아버지의 서랍속엔 어떤 이야기들이 모여 앉아 웅성거릴지...
잘려나간 나뭇가지처럼 육남매를 모두 출가 시켰으니 이젠 자식들 이야기 보다도 꼬물거리는 손자들 이야기가 더 많고 노인정에서 만난 이웃 할머니들의 이야기와 한해 한해 마주보고 저물어 가는 엄마와 아버지의 황혼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을것 같다.
그림이 있고 장식이 붙어 있는 멋진 일기장이 아닌 그저 한권의 빚바랜 무제 노트이지만 아버지의 젊은날에 초상이 고스란히 들어있을 일기장을 훗날 아버지께서 떠나실때 난 유품으로 받아 간직하고 싶다.
남겨진 일기속에서 아버지를 다시 만난다면 아버지의 굽어진 작은 어깨에 대한 그리움을 많이 줄여 나갈수 있을것 같다.
자운영
2005.05.19
http://blog.daum.net/srg6328/157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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