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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바람의 수필] (25) 내집마련 기쁨두배, 이사가던 날
2006/07/18 00:00
입력 조회수 : 683
한국의 평범한 월급쟁이가 이루고 싶은 가장 큰 소망중의 하나는 내집마련일 것이다. 그만큼 내집마련이 어렵기 때문이다. 더구나 요즘같은 IMF체제에서는 그 소박한 꿈마져도 이루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나 하루아침에 실직자로 내몰리는 가 하면 직장에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대부분 월급이 대폭 줄어들었을 테니 말이다. 나같은 경우만 해도 연봉으로 치면 IMF가 터지기 전에 받던 수입에서 무려 50%가 넘게 삭감되었다. 월급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말이 쉽지 실제로는 허리가 휘는 것이다.
쪼개고 아끼며 절인 소금같이 살아가도 월급은 턱없이 부족하기만 하다. 자녀학자금 지원마져 끊겼으니 어려움은 이중으로 커졌다고 볼수 있다. 나는 최근 몇 년을 개인적인 사정으로 전세를 살아왔다. 대전에 허름한 집이 한채 있어 그집을 전세두고 계속 전세를 살아온 것이다.
벌써 오래전부터 대전집을 처분할려고 내놓았는데 팔리지가 않는 것이다. 팔아봤자 전세금 빼주고 나면 남는 돈은 얼마 안되지만. 시세보다 싸게라도 팔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도대체 보러 오는 사람조차도 없으니 답답하기만 할뿐이었다. 그래서 대전집이 팔리기만 하면 집을 살 작정으로 전세를 살아온 것이다. 부동산 경기가 조금이라도 풀리면 팔릴지 모르나 지금은 거의 팔릴것으로 기대하지 않는다.
서울에서 부동산 경기가 살아난다 하더라도 대전에까지 바람이 불려면 더 시간이 지나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전세를 살다보니 툭하면 이사다니게 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내경우만 하더라도 거의 일년이나 이년에 한번꼴로 집을 옮겼다. 전셋집 자주 옮겨 다니는 것이 얼마나 불편하고 힘이 들면 아예 홧김에 무리를 하더라도 집사가지고 들어가는 경우도 보아왔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돈보다 더많은 빚을 내더라도 집을 사버리는 경우다. 그렇게 되면 집값의 절반이상이 빚이므로 이자부담만 해도 엄청나다. 나는 최근에 개인주택에 세들어 살아왔다. 그집에 들어갈때는 살고싶을 때까지 살다가 꼭 내집을 장만해가지고 나가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그럴작정으로 아예 우리가 살고 싶을 때까지 살수 있을 것 같은 집을 골라서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어디 전세살이가 세입자 마음대로 된단 말인가.
작년 8월에 이집에 전세로 들어왔으니 이제 일년도 안됐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 것이다. 집주인이 들어와서 살겠다는 것이다. 강남의 어느 은행의 지점장으로 있는 집주인은 은행 근처아파트에서 전세를 살고 있었다. 그런데 집주인이 직접 들어와서 살겠다는 것이다. 지점장으로 있는 은행의 대폭적인 구조조정으로 퇴출될 위기에 몰려있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집주인이 들어와 살겠다는 데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물론 계약이 최소한 2년은 보장되어있기 때문에 2년 기한 다 채우고 이사가겠다고 하면 할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주인이 자신의 집에 들어와 살고 싶다면 내가 나가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살고 싶을 때까지 살려고 들어온 집이었는데 일년도 채 안돼 우리의 계획이 무너진 것이다. 이집에서 나간다면 어떻게 할까 생각을 해보았다. 또 전세집을 구할까 아니면 이참에 아예 집을 한채 사버릴까 며칠을 고민했다.
마침 뉴스를 들으니 집값이 오를 전망이라고 한다. 집사람과 나는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인가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상의를 했다. 아무래도 집을 한채 사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집을 여기저기 구하러 다녔다. 마누라는 집을 산다는 것이 그렇게 좋고 신이 났던지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잘도 돌아다녔다. 며칠을 돌아다닌 끝에 마음에 드는 집을 하나 골랐다.
집값도 시세보다 조금 싸게 나왔다. 29평짜리 아파트 5층이었다. 준공된지 10년 되었지만 그런대로 깨끗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걱정이 되었다. 이사를 가게 되면 두아이 모두 다니던 학교가 지금보다 더 멀어지게 된 것이다.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다. 두아이 모두 학교가 더 멀어져도 내집에서 사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럼 더 이상 주저할 것이 없었다. 나도 물론 이사가게 되면 회사가는데 마을버스를 한번 더 타야 되고 시간도 더 걸리지만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계약을 했다. 서울에서의 내집마련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비록 처음부터 계획을 세워 이룬 마이홈작전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우리에게는 소중한 내집을 마련한 것이다.
대전에 비록 이름뿐이지만 집한채 있는데다 본의 아니게 서울에 또 한채를 마련했으니 남들은 한채갖기도 힘든 집을 두채나 갖게 된 셈이다.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집을 사면 가장 큰일은 두말할 것도 없이 집값마련이다.
대전집이 팔리면 그런대로 집값을 치루는데 큰 무리가 없을텐데 팔리지를 않으니 걱정이었다. 지금 사는 전세대금을 가지고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나마 융자가 많이 들어있는 집이어서 다행이었다. 은행에서 융자를 받는등 갖은 우여곡절 끝에 겨우겨우 집값을 맞췄다. 기분이 좋았다.
마누라는 이사갈 날이 한달이상이 남았는데도 일찌감치 이삿짐센터에 예약을 했다. 그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이사가기 하루 전날. 마음이 급했는지 마누라는 잠도 자지 않는다. 포장이사라 전혀 신경쓸일이 없지만 그래도 잠이 오지 않는 것 같았다.
저녁때부터 이사가는 날 먹을 것이라며 김밥을 싸는 등 음식을 준비했다. 나도 마음이 들뜨고 이상했다.
그동안 결혼해서 살아오면서 이사다닌 것이 아련한 추억으로 떠오른다. 결혼해서 처음 서울에 올라와서 단칸짜리 전세를 살았다. 200만원짜리 전세였다. 큰 아이인 민주가 세 살때 였을 것이다. 열자도 안되는 작은 방에서 세식구가 앉아있으면 남는 공간이 없었다. 살림살이는 들어갈 자리가 없어서 모두 시골 고향에 실어보내 구석에 쳐박아 두었다.
그나마 방과 부엌이 떨어져 있어서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빗물젖은 밥을 먹어야 했다. 부엌에서 밥상을 들고 마당을 거쳐서 방으로 가져와야 하기 때문에 마당을 거치는 동안 내리는 빗물이 밥상에 떨어지는 것이다. 눈물젖은 빵 못지 않은 빗물젖은 밥을 먹을때 그 심정은 참으로 참담했다.
방바닥에서 일어나면 얼굴이 부딛칠 것 같이 내려앉은 지붕에 후두둑 후두둑 쏟아져 내리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면서 어서 빨리 돈을 모아서 번듯한 내집마련하겠다고 날마다 날마다 결심을 하고 또 결심을 했다. 좁고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아가야 전셋집이 나타난다. 처음에는 내가 얻은 전셋집을 잘 찾지 못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회사에서 퇴근해서 집근처에까지 오기는 왔지만 아무리 골목을 돌고 또 돌아도 개미 코딱지 같은 집들이 다닥 다닥한 곳에서 내가 사는 집을 찾지를 못한 것이다. 하도 골목들이 좁고 미로같아 주민들은 개미골목이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지금와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름대로 꿈과 낭만이 있던 신혼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비록 단칸방살이에 가진 것 없고 먹을 것이 모자랐지만 사랑하는 새색시와 장난감 같이 귀여운 어린 딸아이가 있어서 바라만 보아도 행복하기만 하던 시절이었다. 배추김치 한가지 반찬이라도 밥한그릇 뚝딱 먹어치울수가 있던 가난하지만 아름답고 행복하기만 했던 신혼시절이었다.
분명히 작은것에서도 소중하고 행복함을 느끼던 신혼시절에서 나는 행복은 결코 돈이나 재산이나 권력으로 잴수 없는 것이라는 값진 교훈을 얻을수 있었다. 가난한 신혼시절은 계속 되었다. 월급에서 조금씩 조금씩 쪼개고 아껴 저축하면서 우리의 소중한 미래의 꿈을 키워왔다. 단칸방에서 조금 넓은 전셋집으로 옮기고 둘째녀석 현식이가 태어나고 그렇게 우리의 꿈을 키워나갔다.
둘째아이이자 첫아들인 현식이가 태어났을 때 좋았던 기분은 말로 표현 못한다. 마음속 깊이 밀려오는 뿌듯함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이 지금은 자라서 여고생이 되었고 중학생이 되었다.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살같이 흐르는 세월을 새삼 실감한다. 결혼해서 지금까지 이사다닌 것을 모두 합하면 열다섯번쯤 된다.
마누라는 하도 이삿짐을 싸고 풀러봐서 이제는 이삿짐싸고 푸는데는 전문가가 되었다. 처음에 청주에서 대전으로 왔다. 대전에서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서 얻은 첫집이 바로 개미골목 단칸집이었다. 시골의 부모님께서 올라오셨다가 주무실곳이 없어서 당일로 올라가실 때 가슴이 미어지던 기분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결혼한뒤 지금까지 여기저기 이사를 많이 다니면서 겪은 에피소드도 수없이 많다. 그릇이 깨지기는 부지기수다. 겨우겨우 얻은 전세방에 애써서 장만한 가구등이 맞지 않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을 동동 굴른 적도 있었다.
결국 시골 고향으로 살림살이를 실어보내고 마누라는 서운해서 눈물을 흘릴때 어찌나 안됐던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어디 그뿐인가. 저녁때 대충 둘러보고 계약을 한 집인데 막상 들어가서 살아보니 귀신이 나올것같이 지저분하고 낡은 집이었다. 그방이라도 무너져 쏟아져 내릴 것 같아 밤이 오면 조마조마해서 잠도 제대로 못잔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물난리 난집도 있었다. 비만 오면 지하실에 물이 차는 것이었다. 내가 출근해서 집에 없을 때 비가 오면 마누라는 비상이 걸린다.
지하실에 들어가서 하루종일 물을 퍼내는 것이다. 그냥 놔두면 삽시간에 지하실에 물이 차올라 마당까지 넘치고 부엌으로 밀려 들어오는 것이다. 저녁때까지 비가 오지 않아서 안심하고 잠이 들었을 때 갑자기 비가 쏟아지면 난리가 난다. 지하실 물이 차올라 부엌으로 마당으로 홍수가 된다.
아침에 눈을 뜨면 물위에 둥둥 떠있는 집에서 자고 일어난 것 같다. 처음에 그렇게 까지 물이 새는 집인줄 모르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날 지하실 문을 열었다가 물탱크처럼 꽉차있던 물이 한꺼번에 거센 파도처럼 떠밀려와 가족들이 멀쩡한 대낮에 집안에서 익사할뻔 했던 악몽을 어찌 잊을수가 있을까. 비만 오면 물과의 전쟁을 벌이던 그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아찔하다.
신혼시절 잊을수 없는 아픈 추억 하나가 있다. 전세를 얻어 들어간 집이 너무 지저분했다. 마누라가 부엌에 들어갔다가 놀래서 나를 부른다. 무슨일인가 해서 가보니 기가 막혔다. 부엌 바닥에서 지렁이가 꿈틀대며 기어 다니는 것이었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닌 떼를 지어 기어 다녔다. 시골도 아닌 국제도시 서울에서 이런일이 벌어지다니 어이가 없었다.
시멘트가루를 사와 부엌바닥을 콘크리트 치듯이 덕지덕지 발랐더니 그 후로 지렁이는 나오지 않았다. 벌써 밤이 깊어 새벽이 되어간다. 드디어 날이 샜다. 이사가는 날이 온 것이다. 신기하게도 오늘이 4월24일. 내가 군에 입대하던 날도 바로 21년전 오늘이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입대일인 4월24일에 이사를 가게 되다니 우연치고는 기막힌 우연이라는 생각이 든다.
간밤에 잠을 설쳤다. 두시간이나 잤을까. 또 눈이 떠졌다. 아예 잠이 오기는 틀렸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누라는 완전히 뜬눈으로 밤을 샌 모양이다. 새벽 5시가 좀 넘으니까 이삿짐센터에서 왔다. 참으로 부지런한 새벽을 여는 사람들이다. 옛날에 이사다닐때는 아는 사람 친척들이 다 몰려왔는데 지금은 너무 간편해졌다.
도와줄 사람이 따로 필요없고 이삿짐센터에서 나와서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처리를 해준다. 심지어 이사가는 날은 휴가를 다녀오시라는 말까지 있다. 집주인이 휴가 갔다 돌아오는 동안에 이삿짐센터에서 다맡아서 처리해준다는 뜻이다. 우리는 처음으로 포장이사를 했다. 사다리차로 짐을 내리고 싣는다. 숙달된 전문 일꾼들이 능숙한 솜씨로 짐을 싸고 싣는다.
도착한지 세시간도 채 안되어 짐을 모두 싣는다. 이삿집을 모두 싣고 나와 마누라는 살고 싶을 때까지 살려고 들어온 전셋집을 빠져 나왔다. 아이들에게는 학교 수업 마치고 집에 올 때 이사가는 집으로 찾아오라고 아파트 동 호수와 약도를 몇번씩 단단히 일러 두었다.
아파트에 도착했다. 역시 짐을 능숙한 솜씨로 올리고 정리한다. 일꾼들이 숙달된 솜씨로 척척 짐을 다루는 모습이 보기만 해도 시원시원했다. 일꾼들이 짐옮기는 것을 멍하니 보고만 있기가 미안해서 거들어 주었다. 그러나 요령없이 대들었던게 잘못이었다.
짐옮기는 것을 도와주기는 커녕 방해만 되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쉬운 것이 아니었다. 힘은 더 들었다. 그것도 일이라고 온몸이 지금까지도 뻐근하다. 남하는 일은 쉬워보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실감했다. 참으로 먹고 사는 기술은 다양하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마누라가 전날밤 잠까지 설쳐대며 장만했던 김밥은 더운날씨 탓에 몽땅 쉬어버려 먹을수가 없었다. 아까운 김밥.
점심을 먹을려고 일꾼들에게 메뉴를 주문하니 하나같이 시원한 냉면을 먹고 싶다고 한다. 냉면을 가져오라고 음식점에 주문한다. 일회용 그릇에 냉면을 가져왔다. 비닐봉투에 육수까지 기술좋게 담아왔다. 여기 저기 흩어진 짐보따리 사이에 공간을 만들어 둘러앉아 냉면을 먹는다. 배고픈 것이 반찬이라더니 그야말로 꿀맛이다.
냉면맛이 이렇게 맛있어보기는 생전에 처음이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짐을 정리한다. 도착한지 역시 세시간도 채 안되어 짐정리까지 거의 끝났다. 일꾼들이 모두 일을 마치고 돌아갔다. 마누라는 정성스럽게 구석구석까지 물걸레로 닦고 또 닦기를 반복한다. 저렇게 좋을까.
학교갔던 아이들이 돌아왔다. 혹시 집을 못찾아오지나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괜한걱정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저녁에는 외식을 했다. 맛있는 것 다 사줄테니 뭐든 말해보라고 했는데도 알뜰한 마누라는 허름한 간판이 붙은 음식점을 택한다. 그래도 오랜만에 맛보는 외식이 기분좋다.
마누라는 하루종일 쓸고 닦는다. 아무리 닦아도 힘든줄 모르고 좋기만 한 내집기분을 만끽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TV를 켜니 저녁 아홉시 뉴스가 나온다. 낮에 크게 한일도 없는데 졸리고 피곤하다. 잠이 쏟아진다. 꾸벅꾸벅 거실에서 졸고 있는데 마누라가 방에 들어가서 자라고 깨운다.
밤새도록 자다 깨다 했다. 신기하게 눈을 뜰때마다 마누라는 자리에 없다. 어디갔나 살펴보면 거실을 왔다갔다 하기도 하고 주방을 정리하기도 하면서 몸을 움직인다. 왜 잠을 안자냐고 물어보면 좋아서 그렇다고 한다. 집을 처음 사본것도 아닌데 그렇게 좋은가. 모처럼 마누라에게 좋은 일을 해준 것 같아서 나도 기분이 좋은 하루였다.
<피플코리아/김명수
www.p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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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일 2003년 11월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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