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이사람] (283) 병실에서 만난 사람들지난 9월28일. 그날은 마침 일요일이라 모처럼 집에서 쉬려던 참에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별 생각 없이 받아보니 고향에 계신 어머니였다.
“아들아! 마당에서 넘어졌는데 몸이 말을 안 듣는다, 아무래도 먼저 부러진 허리가 다시 부러진 것 같구나.”
올해 77세로 기력이 떨어져 잘 걷지도 못하는 어머니. 몸은 서울에 있어도 마음은 늘 고향에 계신 어머니에게 가 있던 나는 전화선을 타고 흐르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대형사고라는 직감에 걱정이 앞섰다.
“엄마, 빨리 119 불러요.”
그리고는 한참 후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공주현대병원 입원실이었다. 안타까운 사연을 들은 목사님의 신고를 받고 달려온 119 구급차로 병원 응급실에 실려 온 것이다. 나는 마음이 급했다. 서울 쌍문동 집을 나와 남부터미널에서 고속 직통버스를 타고 병원에 가보니 어머니는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602호실.
“엄마, 괜찮아요? 조심하시지?”
어머니는 병상에 누워서 꼼짝을 못했다. 상황을 알아보니 새벽 6시에 운동 삼아 마당을 걷다가 뒤로 넘어져 허리뼈가 부러졌다. 하필이면 제 3요추 압박골절.
나는 그날부터 어머니가 입원한 병실에서 꼬박 13일을 함께 보내며 꼼짝 못하고 병상에 누워있는 어머니의 손과 발이 되어주었다.
어머니가 입원한 병실은 외과 여성 환자들만 있는 7인실이었다. 여성 환자들만 있는 병실에서 13일을 어머니 간병에 매달려 지내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병실에 있는 동안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토록 즐겨 보던 신문도 안보고 하루 종일 코를 맞대고 살던 인터넷도 처음으로 접어야 했다. 어머니는 수시로 허리 통증을 호소했고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 식사를 하고 나서 생전 처음으로 어머니의 틀니를 닦아 보았다. 링거주사를 맡는 어머니의 대소변을 밤새 받아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병실은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 까지 환자를 찾는 가족들과 문병객들로 왁자지껄 했지만 사람냄새 폴폴 나는 분위기가 싫지는 않았다.
환자들의 구수한 입담도 인상적이었다. 각자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살아온 환자들의 인생 역정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이야기 삼매경에 빠져 들곤 했다.
내과가 아니라 외과 병실이었기 때문에 가족들이 병실을 찾을 때 마다 싸들고 온 음식 꾸러미들로 늘 잔치 분위기가 이어졌다.
70살의 정 할머니. 72살의 유 할머니. 56살의 이 여사. 50살의 진 여사. 60대의 이 할머니. 보험 설계사인 30대 미세스 장. 그리고 어머니. 병실에서 만난 7인의 여성 환자들이다.
병원에 입원하게 된 사연도 가지가지였다. 정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톱질하는 보일러 땔감용 나무를 잡아주다 튕겨나간 기계톱에 그만 손등을 크게 다쳤다.
중풍을 세 번이나 맞은 유 할머니는 화장실에서 넘어져 허리뼈가 부러지는 바람에 다시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보험 설계사인 미세스 장은 맹장염으로 입원하였다. 이 병원에서는 가장 젊은 신세대 환자였다. 그리고 농사 박사로 불리는 이 여사는 남편과 함께 입원한 교통사고 환자였다.
병실에서 만난 사람들. 몸이 아파 괴로운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아닌가. 그래서 그런지 무슨 말을 해도 서로가 통했다.
엄마가 많이 아프다. 평소에 웬만큼 아파가지고는 내색조차 하지 않던 엄마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저절로 터져 나오는 것으로 보아 중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넘어지고 엎어져 팔다리가 부러져 병원에 입원한 것이 벌써 몇 번째 인가. 허리가 부러져 입원한 것만도 두 번째다.
그토록 건강했던 엄마였는데 어느덧 77세의 할머니가 되어 바람 든 무처럼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으니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이 야속하기만 하다.
병실에서의 첫날밤은 아내가 함께 있어 주었다. 밤새 지극정성으로 어머니의 간병을 하는 아내를 지켜보면서 바로 이런 게 가족이구나 싶었다.
물을 떠와서 머리를 감겨주고 대소변을 받아내고 틀니를 깨끗하게 닦아 새로 끼워주는 아내를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다. 아내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는 순간이었다. 이튿날 아내는 서울로 올라가고 병상엔 나 혼자만 덜렁 남았다.
이제는 내가 모든 것을 떠맡아야 했다. 낮에는 그럭저럭 넘어가고 어김없이 밤이 찾아왔다. 보호자용 꼬마의자에 누워 잠을 청해보지만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도저히 잠이 오지 않는다. 벌써 이틀째 엄마도 나도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말았다.
다시 어둠의 장막이 걷히고 병원에서의 사흘째 날이 밝았다. 이제는 환자들과도 많이 얼굴이 익었다.
논산에서 농사를 짓는 다는 이 여사는 입담이 뛰어난 병실의 분위기 메이커였다. 여고시절 문학소녀였다는 그는 학생시절부터 50대 중반의 지금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를 써오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상식이 풍부하고 농사에 관한한 아는 것도 많아 무엇이든 물어보면 척척 막힌 곳을 뚫어주는 농사박사로 통했다.
교통사고로 무릎을 다쳐 한달이 넘게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진 여사는 고향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객지로만 떠돌며 살아온 탓에 정작 고향에서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 병원에서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진여사와 이 여사는 한달이 넘는 병원생활을 하면서 서로 언니 동생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주야장천 긴긴 하루. 얼굴을 맞대고 24시간을 함께 있다보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돌아가면서 서로의 인생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털어놓곤 했다.
한사람이 한마디를 꺼내면 그 말을 받아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말의 찬사. 기계톱으로 손을 다친 할머니는 병실을 찾아온 남편을 보고 피식 웃는다. 아내의 손등을 말없이 바라보는 7순의 남편. 톱날이 튀는 바람에 아내의 손등을 다쳤지만 남편은 겉으로 말은 안 해도 내 탓이라고 여길 것이다.
병실에서 중학교 동창도 만났다. 어머니가 입원한 다음날에 친구의 어머니도 입원을 한 것이다. 화장실에서 넘어져 허리뼈가 부러진 유 할머니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공교롭게도 어머니와 친구 어머니는 집안에서 넘어져 허리뼈 골절로 같은 병실에 입원했으니 우연치고는 참으로 기막힌 우연이 아닐 수 없다. 나도 친구도 장남으로 태어난 것까지 어찌 그리 처지가 똑같은지…. 어머니가 입원을 하는 바람에 친구를 만난 셈이다.
친구의 어머니는 친구의 아버지가 병 수발을 했다. 79세의 할아버지가 꼼짝 못하는 할머니 옆에 바싹 달라붙어서 24시간 간병을 하는 모습은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적이었다. 두 분은 유난히 말이 없었다.
친구는 벼농사에 방울토마토까지 하느라 일손이 달려 어머니 병간호를 아버지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면서 장남으로써 부모님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농사일에 매달리느라 노모의 병상을 지키지 못하는 친구 부부는 밤마다 먹을 것을 바리바리 싸들고 병실로 달려왔다.
저녁때만 되면 아들을 기다리는 할아버지. 이제나 저제나 아들부부가 올까 병실 출입구 쪽으로 고개를 자꾸 돌리며 들락날락거리는 할아버지가 안쓰럽다. 그런 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기에 친구 부부는 농사일로 힘들고 지친 몸을 이끌고 오늘도 버스를 타고 병실을 찾는다.
아들을 보는 순간만큼은 병상의 노모도 입가에 환한 미소가 흐른다. 친구의 어머니는 중풍을 세 번이나 맞고 쓰러져 갖은 고생을 하다가 겨우 거동을 할만 했는데 그만 화장실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다시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엄마가 아프다. 벌써 병원에 입원하기를 몇 번째. 맹장염으로 한달을 입원한 경험도 있다. 일주일이면 퇴원하는 맹장염으로 어머니는 한달을 입원하셨으니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한다.
어머니는 복통을 참다 참다 맹장염이 심해서 결국은 속에서 곪아 터져 버리고 나서야 병원을 찾았다. 안 해도 될 고생을 사서 한 꼴이다. 맹장염이 곪아 터진 배를 움켜쥐고 그제야 병원에 달려온 어머니를 보고 의사도 이런 지독한 환자는 난생 처음 보았다면서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팔이 부러져 깁스를 하고도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혼자 당신의 손으로 깁스를 풀 정도로 어머니는 독했다. 병을 얻고도 병원을 찾지 않으면 몸이 망가지는 법. 그러다 보니 어머니의 병은 갈수록 깊어져 갔고 지금은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엄마가 아프다. 언제까지나 자식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실 것 같았던 어머니가 흐르는 세월에 떠밀려 이제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거린다. 병상에서 신음소리로 하루를 보내는 어머니가 안쓰러워 눈물이 난다.
도대체 자식이란 무엇인가.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이 못난 자식에게 아낌없이 다 주고 이제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빈 껍질뿐인 어머니. 그런데도 어머니는 아직도 자식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어 한다. 당신의 피와 살을 파먹고 여기 이 자리까지 온 어머니의 아들은 지금 어머니에게 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아프다.
병원에 오면 아픈 사람이 왜 이리 많은지. 외과 병실은 특징이 있다. 몸은 비록 다치고 멍들었지만 먹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래서 모두들 먹을 때만큼은 잔치판을 벌인 듯 흥청거린다.
외과 병실 환자들에게 어쩌면 먹고 웃고 떠드는 것이 유일한 낙일지도 모른다. 어떤 보호자가 잡채를 해오기도 하고 어떤 보호자가 김밥을 싸오기도 하고 어떤 보호자가 떡을 만들어오기도 한다.
배 농사를 짓는 할아버지는 기계톱에 다친 아내를 찾아올 때마다 배를 한 보따리씩 가져와 병실 가족들의 입을 즐겁게 한다.
6층의 간호사들도 친절하기로 소문이 났다. 모두 하나같이 얼굴 예쁘고 상냥한 간호사들이다. 밤새 고통에 신음하는 환자들을 위해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는 그들을 지켜보면서 우리나라 의료계에 희망이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흐뭇하다.
어머니와 같은 날 입원하였던 정 할머니가 열흘 만에 퇴원을 했다. 한 병실에서 살을 맞대고 며칠을 함께 울고 웃으면서 지내다 보니 정이 들어 한편으로는 퇴원을 축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별을 아쉬워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퇴원한 다음날 정 할머니는 다시 병실 식구들이 보고 싶어 왔다면서 병실을 찾아주었다.
보험 설계사로 일하는 미세스 장도 입원한지 꼭 일주일 만에 퇴원을 했다. 그는 퇴원을 하는 날 집에 가서 푸짐한 잡채를 만들어와 병실 가족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몸이 아파 들어와서 나아가지고 퇴원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다. 어머니는 식사도 누워서 하신다. 대변을 보는 것도 쉽지 않다. 어머니의 대소변을 받아내면서 왠지 마음이 아려온다. 당신 몸 부서지도록 이 못난 자식위해 희생해 오셨다는 생각에 울컥 목이 멘다.
어머니의 틀니를 닦으면서 모처럼 자식노릇을 한다는 생각도 든다. 처음으로 닦아보는 어머니의 틀니다.
병실의 하루는 어수선하다. 수시로 들락거리는 보호자와 문병객들로 때로는 짜증도 난다. 그러나 여럿이 어울려 지내다 보니 서로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싹튼다. 서로 한발씩 뒤로 물러나서 서로가 서로를 위해주고 아껴주면서 환하고 아름다운 병실 분위기를 함께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병실에서 지내면서 특히 농사박사 이 여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농사를 지으면서 큰 아들과 함께 농산물 유통업을 하는 그는 분명 앞서가는 영농인이었다.
병실은 늘 그가 가져온 메론, 수박, 포도, 토마토 등 각종 과일이 떨어질 날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602호 병실은 6층에서도 가장 먹거리가 풍성하고 이야기 거리가 가장 많은 화제의 병실로 소문이 났다.
어머니는 고령인데다 기력이 쇠약해서 수술도 할 수 없다. 담당의사는 어머니가 예전처럼 다시 거동하기 위해서는 꼼짝을 하지 않고 최소 2개월을 누워서 지내야 한다고 말했다. 살짝만 넘어져도 뼈가 쉽게 부러지는 것은 골다공증이 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드디어 금요일. 입원한지 13일 만에 어머니가 퇴원을 하는 날이다. 그날은 마침 백제문화제 가장행렬 행사로 공주시내가 온통 축제분위기였다.
그동안 동고동락해온 환자들의 뜨거운 환송을 받으며 어머니를 휠체어에 싣고 병실을 나왔다. 택시를 대절하여 허리에 보조기를 채운 어머니를 태우고 집에 오니 저녁이었다. 오랜만에 맛본 산골 공기가 상큼하다.
7인의 환자들과 함께 한 13일의 병실생활. 9월 28일 입원해서 10월 10일 퇴원하기까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것은 나에게 긴 추억을 남겨 주었다. 그리고 어머니와 밤낮 코를 맞대고 그토록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도 그때가 생전 처음이었다.
병실에서 고락을 함께한 마음이 따뜻한 환자들의 빠른 쾌유를 기원한다.
어머니를 고향에 남겨두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야 했던 나는 지금 다시 예전의 서울생활로 돌아와 있다.
어머니는 지금 집에서 힘겨운 투병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몸은 비록 서울에 있지만 마음은 늘 고향에 계신 어머니에게 달려가고 있다.
어머니가 살아있다는 자체만으로도 한없이 고맙고 감사할 뿐이다. 하루빨리 어머니가 다시 예전처럼 몸을 추슬러 거동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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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코리아/김명수기자
www.pkorea.co.kr>
2003년 10월15일 11시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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