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이사람] (8) 연극연출가 고금석 (2)
2003/08/05 00:00 입력
트위터로 기사전송 페이스북으로 기사전송 미투데이로 기사전송 다음요즘으로 기사전송
[클릭이사람] (8)  연극연출가 고금석  (2)

연출의 시작-

첫연출은 연극 2년째인 2학년(첫해도 2학년이었으니 결국 유급하고 말았다는 사실은 독자들이 알 것임)에 맡았다. 연출의 매력은 대단했다. 배우들에게 군림하는 순간의 쾌감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특별히 연출로서의 능력은 발휘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7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히트작을 하나 만들 수 있었다. '관객모독'이라는 작품을 쓴 페터 한트케라는 작가는 이전까지의 작업방식을 완전히 뒤집어놓았다. 그는 일종의 반연극의 기수였다. 관객모독은 덕수궁 옆의 세실극장에서 공연되었다. 보름 공연기간 동안 전 좌석이 매진될 정도로 대성황이었다. 극장은 관객으로 미어터져 나갔다.

객석은 시뻘건 무대를 배경으로 욕을 해대는 배우들로 인해 아연 긴장에 들떠 있었다. 어떤 연인커플은 공연 시작 5분쯤 되었을때 정신의 긴장을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만 기절하여 업혀나가는 소동까지 있었다.

2년후 기국서씨가 연출하여 더욱 유명해진 이 작품은 프라이에뷔네 창단이후 처음으로 돈방석에 앉게 해주었다. 미국으로 이민가 이젠 교통사고로 고인이 된 최성완이라는 후배가 그때 기획을 봤다.

마지막 공연이 끝나고 시내 예매처의 표 판매대금을 수령하여 술을 마시다 지친 우리들은 여관에 들어가 돈가방을 쏟아부었다. 이부자리에 수북히 쌓인 돈을 방안에 날리며 돈더미 위에서 잠이 든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후 그런 기회는 단 한번도 그의 연극사전에 나오지 않았다.

국립극단 입단-

인상에 남는 연출작품으로는 역시 페터한트케의 '카스파'라는 작품이 있다. 16년간을 동굴에 갇혀 지내다 비로소 세상에 첫발을 내디딘 카스파 하우저라는 실존인물의 비극을 다룬 작품인데 극형식이 새로워 이 작품 역시 관객들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특히 인간의 의식을 획일화하는 언어의 폭력성을 고발하여 신선한 충격을 불러일으켰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당시 우리 한국 연극계에는 사무엘 베케트나 이오네스코, 아라발 같은 부조리극이 성행하던 때라 페터 한트케의 작품들은 신선한 충격 그 자체로 관객의 마음을 뒤흔들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러나 관객모독만큼 많은 돈을 안겨주지는 않았다. 78년 4학년만 3년째 다니던 그는 전국대학연극축전에서 오영진의 '허생전'으로 우수상을 받고 대학생으로 국립극단 공채에 합격하는 영광을 안았다. 남들은 기성극단에서 10여년 이상 연극생활을 해야 입단할 수 있는 국립극단 합격은 대학 9년 연극생활을 인정해주는 것 같아 한없이 자축하고 싶을 정도로 그에게 기분좋은 사건이었다.

기성극단의 창단-

그러나 국립극단은 그에게 그리 큰 만족을 주지 못했다. 우선 레퍼토리 선정이 불만스러웠다. '에밀레종' '성웅 이순신' '객사' 등 이상야릇한 역사물만 다루는 구태의연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선배배우들도 예술가라기보다는 무슨 공무원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많아 마음에 거슬렸다. 그래서 다섯 달인가 만에 그만두고 1979년 프라이에 뷔네 선배들과 극단우리극장을 창단하였다.

본격적으로 연극을 해보자고 기성극단을 창단한 것이다. 창단 첫 공연부터 흥행상의 참패를 기록하였다. 게오르크 뷔히너의 '레온세와 레나'라는 작품이었는데 독일문학이 우리 연극관객 정서에 맞지 않나 싶을 정도로 호응이 저조했다. 이때 유진규라는 마임이스트를 처음으로 만나 작업을 같이 하였고 성우 양지운씨도 동참해 창단을 이끌었다.

한가지 기억에 남는 일은 유인촌씨가 주인공 오디션을 보러왔다가 그만 낙방을 한 사실이다. 당시는 유인촌씨가 막 연극을 시작하려던 때여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연출가로서 연기자를 보는 눈이 없어서 그런 좋은 배우를 놓친 것 같아 아직도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연극하는 인생-

79년 벽두에 창단되어 10개월남짓 극단으로부터 들어오는 수입은 전무하였다. 온갖 고생을 하여 대학공부를 시킨 부모님 뵐 면목이 없었다. 진학사라는 잡지사에 취직을 하였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연극하는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이 직장에서 그는 아내 김신혜를 만나 결혼을 하는 행운도 얻었다.

그러다 고려대 연극반 동기인 최유진을 만나 75년에 히트했던 '카스파'를 리바이벌하기로 뜻을 모으고 본격적인 흥행을 노리기 위해 기획사도 만들었다. 기획사 이름은 '앞서가는 멋쟁이 HQ'. 정말 멋진 기획사 이름이었다. 배우로는 역시 고려대 연극반 동기인 최선택을 기용키로 하고 칠레로 이민가 가방장사를 하는 최선택을 한국으로 데려와 연습시켰다.

80년대 군부독재의 암울한 시기를 언어고문에 비유해 연출한 이 작품은 관객으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83년초에 시작된 이 공연은 84년으로 접어들면서 100회를 돌파하고 흥행에도 성공을 거두었다. 서울극비평가그룹에서는 카스파를 그해의 최우수작품상으로 선정해 흥분에 들뜨게 하기도 했다.

기획자 최유진은 1년 가까이나 국립극단에 있을 때보다도 더 많은 월급을 꼬박꼬박 주었다. 카스파의 배우는 가방장사 최선택이 초연 한달 만에 칠레로 돌아간 이후 주진모로, 고금석으로 바톤 텃치를 하며 이어졌다. 84년초 카스파의 성공에 자극받은 그는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연극에만 전념하기로 하였다.

고씨는 직장을 진학사에서 문화어연(정철카세트만든 회사)으로 옮기고 사장(정철)을 꼬드겨 영어연극단을 만들어 연극만 전담하며 월급을 받는 특이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그들은 카스파의 후속타를 만들었다. 작품 제목은 카를 스테른하임의 '팬티'. 예상치 않은 흥행실패에 당황하였다. 카스파의 기세도 꺾여 적자를 면키 어려운 지경이었다.

당연히 최유진은 월급을 주지 않았다. 때맞춰 아들 '고영권'이 세상에 나왔다. 문화어연이라는 직장도 그만둔 상태에서 수입이 없으니 당장 영권이의 우유값이 문제였다.

그때 춘천의 윤고성(고씨의 연출작품에 무대장치를 가장 많이 해준 무대디자이너)이라는 친구가 가산을 다 정리하여 춘천으로 와서 함께 연극을 하자고 꼬드겼다.

춘천시대-

85년 가산을 다 정리하여 친구따라 연극하러 춘천으로 갔다. 생계수단으로 강원대 후문에 카페를 냈다. 카페 인테리어는 그의 친구인 윤고성이 맡아 해줬다. 카페 이름은 '돌은 움직이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쓰는 것일까'였다.

이 이름은 이문재시인(경희대 재학중 극단우리극장에서 연극을 하였음)이 쓴 시의 제목으로 강원대 학생들은 이름이 너무 길다고 첫자와 끝자만 따서 '돌까'라고 불렀다.

카페는 성업을 이루었다. 그러나 막상 연극을 같이 해야 할 윤고성이 건축업으로 전업을 바꾸는 바람에 춘천을 자주 비워서 춘천에서의 연극작업은 활기차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극단우리극장의 운영은 지지부진하였다. 특히 연출을 맡을 사람이 없어서 그가 카페를 비우고 춘천과 서울을 오가며 작품연출을 하였다.
 
연습이 늦어져 춘천을 올 수 없는 날에는 연세대 앞의 만화방에서 2000원을 주고 하룻밤 묵었다. 우리극장을 운영하느라 춘천과 서울을 오가는 세월이 5년… 그러다 89년에야 춘천연극에 뿌리를 내릴 요량으로 '춘천앙상블'이라는 극단을 만들었다.

창단공연 작품으로 '광대학교'의 막을 올렸으나 집주인과의 불화로 카페의 문을 닫게 되면서 다시 생계수단에 문제가 생겼다. 기껏 한 작품을 해보고 춘천 연극생활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연극을 하지 못할 바에야 굳이 춘천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었다. 다시 서울행을 모색하였다. 신문사에서 교열기자를 모집한다는 광고가 내눈에 들어왔다.

신문에서 전주시립극단으로-

92년 신문사에 들어온 후 극단우리극장에서의 연극작업은 춘천에서보다 훨씬 손쉬웠다. 우선 근무시간이 마음에 들었다. 근무시간을 피해가면서 하루에 여섯시간 정도는 연습을 할 수 있었다. 새벽 네시까지 야근을 한 다음날에는 하루종일 연습을 할 수가 있어서 무엇보다도 날아갈 것 같았다.

이때는 주로 가족극과 창작극에 관심을 가졌다. 가족극 '비밀모자'는 '아버지를 바꾸세요' '유쾌한씨 비밀모자' 등으로 제목을 바꾸어가며 400회 이상의 공연기록도 세웠다. 90년대에는 주로 창작극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문열의 '시인',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 장정일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연기 송승환), 고은 시인의 '만인보' 등을 각색하여 무대에 올렸다.

특히 90년에 전주시립극단의 객원연출로 무대에 올렸던 '만인보'는 현재 그가 전주시립극단의 상임연출로 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90년 당시 그는 전주시립극단원들과 만인보를 연습하면서 전라도의 사투리가 가지는 황톳빛 생명력을 흠뻑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앞으로 2년간 전주시립극단 상임연출로 계약을 했다. 10년 가까이 정든 신문과의 인연을 놓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남도의 소리와 색깔과 힘줄 불끈 솟는 생명력 꿈틀거리는 몸들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연극에 미쳐 내노라하는 신문의 기자직까지 때려친 그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남은 인생을 연극에 걸기로 했다. 자신의 인생에서 연극을 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그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 이 기사는 피플코리아의 허락 없이 그 어떠한 경우에도 무단 전재나 무단 사용을 금지합니다. 피플코리아에 실리는 모든 기사의 저작권은 오직 피플코리아에 있습니다.

<피플코리아/김명수기자 www.pkorea.co.kr>

2000/05/16 10:10


피플코리아 홈으로 바로가기     클릭이사람 명단 1~345번 


인터뷰 전문기자 김명수의 클릭이사람 취재는 앞으로도 계속 됩니다 / 좋은 분 있으면 추천해 주세요 / 피플코리아 운영자 김명수 / 전화 010-4707-4827 이메일 people365@paran.com

[ 김명수기자 people365@paran.com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hsshss2927@hanmail.net
대한민국 대표 인물신문 - 피플코리아(www.peoplekorea.co.kr) - copyright ⓒ 피플코리아.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