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이사람] (98) 이원 의료재단 이사장 박병설
일생을 이보다 더 파란만장하게 살아온 사람도 드물 것이다. 황해도가 고향으로 한국전쟁때 혈혈단신 월남하여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지금의 자리까지 왔다. 임상·해부 병리 매출규모 월 15억 안팎으로 국내1위를 자랑하는 이원 의료재단 박병설 이사장(72)이 바로 주인공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항상 혼자였다. 철부지때 혼자 일본에 건너가 거기서 중학교를 졸업했다. 해방후 중국 長春에 가서 3년동안 있다가 다시 평양으로 온다. 김일성 대학 재학중 한국전쟁을 맞아 단신으로 월남한다. 고아아닌 고아. 그렇다. 아무리 어려워도 의지할 사람이 없었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무슨 일이던지 스스로 헤처 나가야 했다. 그러다 보니 남들보다 자립심이 강해질수밖에 없었다.
경희대 경제학과 출신. 대학원은 엉뚱하게 행정학과를 나왔다. 학교 졸업후 공무원으로 들어가 건설파트에서 5년간 근무하다 섬유 수출업체로 스카웃되어 15년을 일한다. 낙후된 섬유업계보다는 첨단 의료기술인 동위원소와 관련된 사업을 직접 해보고 싶어서 대표이사로 있던 섬유회사를 나와 82년 이원양행을 설립한다. 회사 설립후 동위원소 수입·판매사업과 함께 혈액검사에도 그것을 활용했다. 그후 혈액 검사 분야에 주력을 한다. 이원양행이 모체가 되어 90년 이원의료재단을 설립했다.
평소에 생명공학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동위원소는 핵의학 분야에서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환자의 질병에 대해 고도의 검사를 할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을 느껴 이 분야에 평생을 걸기로 마음먹었다. 개인 업체로 동위원소 및 혈액검사 분야에 뛰어든 것은 그가 국내 처음이다. 당시 동위원소가 널리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외국의 사례로 볼때 발전가능성이 크다고 확신했다. 전문분야에 있는 실력있는 의사들을 적극 영입했다.
관련업종에 종사하는 병원의 의사들이 처음에는 이원양행에서 검사하는 결과에 대해서 인정을 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고도의 자체기술을 개발하면서 전국적으로 인정을 받기 시작한다.
회사를 세운지 1년이 지나자 경쟁업체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원양행은 출범 2년만에 이분야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신뢰를 받는 업체로 성장한다. 회사를 키워나가면서 의료전문가들의 자문을 많이 받았다. 그런 분들의 도움이 회사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성격의 소유자. 상대편의 잘못을 용서로써 다스린다. 정직하고 정확한 것을 철칙으로 삼는다. 적극적이고 부지런 하기로는 누구도 그를 못 당한다. 회사 설립후 지금까지 18년동안 단 하루도 결근을 하지 않았다. 새벽출근은 기본. 아침 7시30분이면 어김없이 사무실에 도착한다. 유난히 부지런한 사장님을 모시는 사원들이 혹시 부담스럽지 않을까 싶어서 물어보았더니 대답이 걸작이었다.
"혹시 야간 당직자가 근무하는 중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걱정되어 일찍 나오다 보니 조기출근은 자연스럽게 생활 습관이 되어버렸습니다"
살고 있는 집은 강동구 둔촌동 개인주택. 아침 5시30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집안팎 청소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눈을 뜨자 마자 빗자루를 들고 집마당은 물론 동네 골목까지 깨끗하게 청소한다. 거리 청소 10년 만에 주민들의 추천으로 그는 자랑스런 시민상을 받는 영광을 누린다. 그의 새벽 거리청소는 지금도 계속된다.
부지런함이 빚은 에피소드 하나. 매일 새벽 집앞 골목을 쓸때마다 두부와 콩나물을 파는 노점상을 만났다. 노점상의 눈에 골목 청소를 하는 그가 먹고 살기 힘든 불쌍한 사람으로 비쳐진 모양이다. 그가 사장이라는 것을 알리 없던 노점상.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한날 하루같이 새벽이 되면 비질을 해대는 그를 지켜보던 노점상은 마침내 그에게 꾸러미를 내밀었다. 펼쳐보니 두부 3모와 콩나물 두봉지. 매일 아침마다 선물꾸러미는 계속된다.
무려 2년6개월동안 그는 아침마다 노점상이 건네주는 사랑의 선물꾸러미를 들고 왔다. 2년 6개월이나 계속된 노점상의 빛나는 선행도 대단하지만 사장이라는 신분을 밝히지 않고 선물을 받아 들고온 그도 보통사람은 넘는다. 두부와 콩나물은 아직도 코끝이 찡한 인생드라마로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에게 또하나 빼놓을수 없는 것은 조깅. 매일 아침 청소후 2km를 달린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조깅을 하다 보니 건강 유지에 큰 도움이 된다. 조깅으로 땀을 흠뻑 흘린후 샤워하고 아침식사도 빼놓지 않고 매일 한다. 그리고 나서 회사에 부지런히 나오면 아침 7시 30분.
주민들의 추천으로 감투도 많이 썼다. 송파구 새마을 지회장, 송파문화원 부원장, 방이동 자문회 회장, 송파경찰서 고문, 강동구 방위협의회 위원 등을 맡고 있다. 자잘한 감투를 많이 맡다 보니 회사업무가 끝나고도 사생활이 거의 없다. 시간은 많이 빼앗기지만 나름대로 주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보람을 느낀다.
2남3녀의 자녀들을 모두 결혼시켜 내보내고 부인(임숙경·69)과 단둘이 오붓하게 생활하고 있다. 대학교때 같은과 친구의 여동생인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우연히 놀러갔다가 처음 보는 순간에 홀딱 반한뒤로 친구에게 여동생을 달라고 3년이나 졸라서 결국은 아내로 만들고 말았다.
회사를 이끌어 오면서 자금 회전 상태가 안 좋을때 가장 힘들다. 특히 IMF때 타격이 컸다. 외국에서 의료시약·기자재를 전량 수입해 오기 때문에 환차손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상여금을 주지 못할때는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직원들의 협조와 절제로 이겨낼수가 있었다. 지금은 다행이 IMF이전 상태로 돌아왔다. 회사 경영에는 큰 문제가 없다.
사원관리는 역시 사랑으로. 사랑과 진실로 사원들에게 모범을 보인다. 스스로 모범을 보여 사원들이 따라오게 하는 스타일이다. 3백여 직원의 생일을 일일히 챙긴다. 사원들의 생일카드를 회사대표인 그가 직접 만들고 기념품까지 넣어서 빠짐없이 전달해 주고 있다. 근 10여년째 계속 생일 카드 선물을 해주고 있다. 이런 사장이 또 있을까 싶다. 고학으로 대학원까지 나오고 오늘까지 살아오면서 외로움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사장의 이런 섬세하고도 자상한 배려가 사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큰 힘이 된다는 것을 그는 오랜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수십년을 계속해온 조깅 덕분에 86년 아시안 게임과 88년 서울 올림픽 때 성화봉송주자로 뛰기도 했다. 조깅 독서 음악감상을 즐기지만 정작 할법한 골프는 시간이 없어서 안친다.
박이사장은 그동안 큰상도 많이 받았다. 방사성동위원소를 이용한 의료분야 발전에 공헌한 실적을 인정받아 90년 4월 제23회 과학의 날에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였다.
95년 조세의 날에는 성실한 납세기업체로 표창을 받고 일일 명예서장에 임명되어 집무하기도 하였다. 99년3월 성실한 납세기업으로 선정되어 재정경제부장관의 표창장을 수상하였다.
IMF이후 회사 경비절감책의 하나로 본인 스스로 자가용 승용차를 타지 않고 지하철로 출퇴근을 하고 있다. 공식 업무차 외근을 나갈때도 지하철을 이용하고 있다. 사원들에게도 지하철이용을 적극 권장하여 5호선 방이역으로부터 명예역장으로 임명받아 지금까지 봉사하고 있다.
앞으로 의료계통의 발전을 바라보고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박이사장. 이야기 보따리를 미쳐 다 풀기도 전에 선약에 쫓겨 시계를 들여다 보며 안절부절 못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더이상 붙잡고 늘어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70을 넘긴 고령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각과 사고는 아직도 '젊은 오빠' 였다.
* 이 기사는 피플코리아의 허락 없이 그 어떠한 경우에도 무단 전재나 무단 사용을 금지합니다. 피플코리아에 실리는 모든 기사의 저작권은 오직 피플코리아에 있습니다. <피플코리아 김명수기자/
www.pkorea.co.kr>
2000/11/14 10:31:58
피플코리아 홈으로 바로가기 ☞ 클릭이사람 명단 1~345번 ☜